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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

왕세자 혼혈결혼의 비밀

by 어린왕자


명치천황은 이은에게 특별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시한부 사랑을 베풀었다. 그야말로 인질에 대한 독 묻은 사랑이었다. 그러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그날 1910년 8월, 이은에게는 새로운 고난의 시절이 시작되었다.


<왕세자 혼혈결혼의 비밀 >은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명치천황과 일제 당국자들이 인질 이은에 대한 대우를 매우 야박하게 바꾸는 시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ㅡ작가의 말


지은이 송우혜는 소설가이며 사학자로, 194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간호학과에 입학하여 중퇴하고 한신대 신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이화여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 1984년 삼성문예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눈이 큰 씨름꾼 이야기><스페인 춤을 추는 남자>, 장편소설 <남도행><저울과 칼><하얀 새>, 산문집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 등이 있고, 평전으로 <윤동주 평전><송창근 평전> 등이 있다.


황태자 이은은 머리가 좋았고 똑똑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왕세자로 불렸고 저택의 어학문소에서 대학교수들에게서 배우는 대신 특별귀족학교인 학습원에 편입하여 일본 학생들과 경쟁해야 했다.

합방 전에는 일본인들이 이은을 대할 때 늘 조심스럽고 정성스레 대했다. 혹시라도 어린아이가 인질로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해 계속 잡아두기 힘든 문제가 생길까 봐 염려했던 것이다. 늘 일본 황태자와 같이 대했다. 어린 인질 이은을,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귀하고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합병이 되고 나서 그들은 식민지의 왕세자에 불과한 작은 아이를 더 이상 금 간 유리그릇을 다루듯 애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일본식 삶과 일본식 교육을 더 빨리 철저하게 익히게 해야 했다. 새 학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1914년 1학년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중간에 이은을 귀족학교인 학습원에 편입시켜 버렸다.

당시 일본은 위계질서가 엄격한 계급사회였다. 그 한가운데 매정하게 던져진 이은은 왕세자로 격하된 사실이 그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은은 항상 우등생이었고 그 뛰어난 결과를 보고 느끼는 환희는 대단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중류층은 매우 불쾌해했다. 오늘의 일본을 이끌어갈 황족과 귀족의 자제들에게 이은의 우등 성적은 자신들이 조선의 왕세자보다 못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었기에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이은의 성적이 날로 향상되자 일본은 이은이 체격과 체력에서 뒤처지는 군사학교로 보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평민 가정 출신이다. 군사학교에서 이은은 당연 뒤쳐지게 된다.


1차 대전이 일어나자 중국 대륙 침략에 착수한 일본은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확고히 굳히기 위해 이은의 혼혈결혼을 서두른다. 일본과 조선 양국에서 3인의 후보 중 하나인 이본궁 방자 여왕을 이은의 약혼녀라 발표했다. 이것은 일본 황실의 일방적 조치였으며 이본궁 방자는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체질이라는 모함을 받아 왕세자비로 정해졌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이은이 일본에 인질에 간 1905년 이후 한 번도 그는 고국을 밟지 못했다. 친모인 엄귀비는 이은이 군사학교로 보내지자 분하고 억울함을 토로하다 기맥이 막혀 쓰러지며 57세의 나이로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일본은 이은에게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단지 장티푸스로 별세했다며 사망소식을 알렸다.

이은의 나이 13년 9개월이었다.

그러나 이은은 이 끔찍하고도 비극적인 참변에도 철저한 통제 속에 엄귀비의 장례식에 참여했고 5년이 흐른 1911년 비로소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들의 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 왕실로 하여금 한일합방 이래 미뤄뒀던 천기봉사를 거행했으며 조선의 임금이 일본에 가서 신하의 자격으로 일본 천황을 배알 하는 예식을 치르면서 일본과 조선의 결속을 다지려 했다. 1917년 우여곡절 끝에 순종은 일본천황을 배알하고 왔다. 그 이후 순종에 대한 실망과 항의로 누군가가 창덕궁에 불을 질러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 화재로 일본에서는 조선을 대하는 태도가 크게 변했다. 이은에게 자주 고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

1919년 1월 25일 이은과 이본궁 방자 여왕의 결혼식이었다. 일본은 의도적으로 세상에 알리려 했다. 1919년 1월 18일에 개막된 파리강화회의의 일정과 직결되었고 그들을 파리로 신혼여행 보낸 뒤 세계열강의 대표들에게 보여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은의 결혼은 고종의 사망설과도 직결되어 있다. 당시 고종은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밀사를 파견하려 애썼고 그런 상황에서 이은의 결혼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낸다는 신문기사는 청천벽력이었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될 국권회복의 길을 물거품이 되겠다는 생각에 과도한 스트레스로 쓰러져 붕어했다.

당시 일본은 이은과 이본궁 방자의 결혼을 파리강화회의에 활용할 계획이었기에 고종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결혼식을 진행하려 했다. 고종의 사망 사실도 숨기려 했으나 정보를 들은 상인들이 국상에 대비해 삼베를 구하는 등 이미 고종의 사망한 사실이 새나가 어쩔 도리 없이 일본은 이은의 결혼식을 연기했다.

산 고종은 아들의 결혼식을 막을 방도가 없어 고뇌 끝에 죽었는데, 죽은 고종의 시신은 간단하게 아들의 결혼을 막아낸 것이다. 결국 이은의 혼혈결혼이 고종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ㅡㅡ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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