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에 붉게 퍼진 노을이 아직 멋지다
한여름을 걷어내고 가을을 심었다.
가을이 심긴 자리는 아직 뜨겁다. 발길질에 차여도 무거운 돌덩이 하나 차마 함부로 내치지 못했다. 손으로 훑고 훑어도 돌덩이는 끄덕 않는다.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안다. 툭 내던져진 돌덩이는 갈 곳이 없다. 내 손안에 덩그러니 앉아 헤매는 눈동자에 시선이 머물다 문득 가을이라는 언어가 내 안에 들어와 안긴다.
어쩌지 못한다.
가을 파종을 하면서 골을 팠다. 쓱쓱 갈라지는 골 사이로 파종한 씨앗이 고이 묻힌다. 부드럽게 파인 골에는 아직 긁어도 긁어도 걷혀 나오는 뜨거운 양지 아래 짓눌린 한여름의 열기가 묵직하다. 날카로운 호미 끝에 매달린 열정은 다시 부드러운 골 속으로 쉼 없이 파고든다. 떠나지 않으려는 몸짓이 서투르다 못해 서글프다. 가을은 이미 땅 속 깊이 덮였는데.
아직 해넘이는 산마루에 걸터앉아 나의 얼굴에 스민다. 모자로 온통 뒤집어쓰고 해를 막아도 뚫고 들어오는 마지막 몸짓에 슬며시 고개를 들어 눈짓한다. 호박 넝쿨이 뻗혀나간 길이보다 더 길어진 한여름 해넘이가 잔잔한 파도처럼 지붕 끝에서 머문다. 쉬이 고개를 넘질 못한다. 해가 지면 시원한 그늘을 기대했는데 아직은 더 기다려야 한다.
어스름에 붉게 퍼진 노을이 아직 멋지다. 그렇게 가을이 오고 있다.
고춧대에 앉은 사마귀는 도대체 떠나질 않는다. 저 녀석이 온 지는 한참인 것 같은데 매주 봐도 새로운 녀석이다. 고추를 딸 수 없어 가지만 흔들다 머뭇거린다. 삶의 터전을 함부로 뒤흔들 수는 없어서 그대로 두었다. 인연이 깊은 걸까, 엊그제 스파게티를 먹는 식당에서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저 녀석을 봤는데 낯설지 않은 기시감이 왠지 벅차다. 무슨 인연이길래, 어떤 인연이길래.
텃밭의 오후는 아직 한가롭다. 조용히 자기 자리를 내어준 풀벌레에게 아직은 다가와 앉으라 손 내미는 고춧대를 바라보다 함께 사는 인생이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 된다. 고추를 한 줌 따지 못해도, 아직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로 얼굴빛은 타들어가도 어김없이 가을이 오고 있기에 여유로운 마음은 언제나 므흣하다.
하늘빛이 머문 텃밭에 저녁노을이 내려앉아 붉은 마음을 더 붉게 수놓는 가을을 그리며 선 이 순간도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