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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Mar 01. 2024

지금도 꽤 괜찮은 삶이야

자화상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아이가 오지 않습니다.  강아지 순둥이는 격하게 나를 반기며 바짓가락을 잡고 흔드는데 정작 아이는 집에 없었습니다. 저 좋아해 주는 엉아가 없어 내게 더 달라붙어 이뻐해 달라 물고 늘어집니다.  발라당 뒤집어 앙탈 부리다가 다시 재빨리 가슴팍으로 뛰어오르기를 반복하자 할머니가 이노옴~~ 고함을 지르십니다.  눈치는커녕 막무가내로 저 혼자 뒤집고 발라당 누웠다 일어났다를 연신 반복합니다.  


 



집을 봐주러 오신 칠순의 할머니는 아파트 출입문을 열지 못해  '누구요' 말씀만 하시곤 답이 없으셨습니다.  

삐삐 삑~~~  일전에 아이가 알려 준 출입구  비밀번호를 누르고 1층 로비로 들어섭니다.  지금쯤은 아이가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무소식인 걸 보니 집에 없는 게 확실한가 봅니다.  1층 로비로 들어서는데 이놈이 어디로 갔을까 심히 궁금해졌습니다.  전화를  하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싹싹한 어느 여인의 목소리만 귓가를 우렁차게 때립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숨 가쁜 소리를 내며 아이가 전화를 걸어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와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데 자꾸 곁눈질로 나를 쳐다봅니다.  좋은 눈빛이 아님을 느끼지요.  상대방은 그냥 바라본다는 게 내가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고요.  괜히 인사했나 싶다가도 인사를 한 사람이 민망스러운 게 아니라 받아주지 않는 상대가 더 민망스러워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맘에 내가 눈길을 피해 버립니다.  내려야 할 층수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황급히 내리면서도 인사말이 툭 튀어나옵니다.  

'올라가세요.'



요즘은 좁은 공간에서 같이 숨 쉰다는 게 참 힘듭니다.  너무 어색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괜스레 폰만 만지작거리나 봅니다.  아이들이 왜 저 혼자 고개 숙이고 있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냥 눈길 마주치기 싫다는 뜻이겠죠.  어른도 때론 그러한가 봅니다.  눈인사마저 아까운 세상이 되는가 싶어 씁쓸했습니다.  




누군가 했네, 어서 들오소. 근데 이놈은 오데 가서 오지 않고 선생을 기다리게 하노. 어이구~ 저리 가, 그만 짖어 콱~ 마.  짖어대는 강아지를 향해 할머니는 냅다 소리를 질러댑니다. 강아지 짖는 소리보다 더 우렁차고 힘이 있습니다. 건강하신 거죠.


칠순의 노모는 혼자된 자식이 일하랴 아이들 건사하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워 도움을 주려 영도에서 먼 길을 온다 하십니다.  영감이 여기 병원에 있잖아, 하시면서 주섬주섬 주전부리를 챙기십니다.  평소엔 바로 수업 들어가지만 오늘은 좀 특별합니다. 손자 녀석이 농땡이를 치니 선생 이리 와서 커피나 한 잔 하소, 하시는 노모의 정성이 자연스럽습니다.  네, 나도 자연스레 다가가죠.  


오렌지 하나를 뭉텅그레 잘라 접시에 두고는 나를 식탁 한 켠으로 안내합니다.  평소 같으면 후다닥 강아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시는데 오늘은 아이가 없어 헤매고 있는 나를 챙기시며 얘기를 건네십니다.



초년에 고생 좀 했네.  인자는  말년에 갈수록 돈도 생기고 살 만하겠다.  내가 좀 본다 하십니다.  순간 머뜩했죠.  

우리 딸도 이마 까고 머리 묶어라 해도 지지리 말도 안 듣는다,  자네도 이마 까고 머리 묶어 다니라  얼마나 이뿌노.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는 오지 않습니다.


이때다 싶어 미간에 생긴 주름이며 입가에 생긴 주름 때문에 고민입니다 했더니 아서라~ 이쁘다 보톡스 넣지 말고 옆으로 이리이리 땡기봐라 하십니다.  주름 피진다 말라꼬 그 씰데없는 약 넣을래 하시면서.  눈썹은 좀 검은 거로 기리고 쌍꺼풀만 좀 하면 좋겠네,  툭 던지십니다.  



불혹에 미혹되지 않고 지천명에 인생을 안다 했다.  자네 인생이 지금 자네 얼굴에 그대로 있다.  앞으로 잘 될 끼다.




기분 좋은 말입니다.  어르신의 말씀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좀은 괜찮게 살은 모양입니다. 가르치러 왔다가 이렇게 또 뜻밖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이가 후다닥 현관문을 열어젖히며 달려들자 강아지가 놀라 벌러덩 자빠지며 순간 얼어버렸습니다. 어디 갔다 왔니 묻기도 전에 할머니의 투박한 손이 머리 위로 먼저 올라갑니다. 까먹고 다른 학원을 먼저 갔다네요. 정신머리 없는 놈이라고 한 대 더 휘두르시더군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머금고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며 남은 시간 잘 놀았습니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에도 책과 씨름하며 눈알 굴려야 하는 아이들. 나도 그랬고 할머니도 그랬고 그것이 그때는 전부라고 여겼던 거죠.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아~미루고 미뤘던 쌍꺼풀 수술을 지금이라도 해야 하나 살짝 고민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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