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
한때 유행처럼 퍼졌던 이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땐,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청춘은 원래 아픈 거고, 그 아픔 덕분에 우리가 성장한다고 말이죠.
어른들께는 젊었을 땐 사서도 고생하라는 말도 자주 들었으니까요.
그런데요, 정신과 의사로 살아오며 진료실에서 만난 수많은 분들—그리고 가끔은 제 자신을 떠올릴 때—저는 이 말을 점점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파야만 하나?”
물론 어떤 고통은 지나고 나면 단단함을 남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저는 계란을 정말 좋아합니다.
반숙, 완숙, 스크램블… 그날 기분 따라 조리법을 바꾸는 재미도 있고요.
그중 가장 좋아하는 건 써니사이드업입니다. 흰자는 익고 노른자는 말랑한 그 절묘함이 저는 좋습니다.
그런데 아시죠? 불 조절 잘못하면 노른자가 퍽퍽해지고 유황 냄새가 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적당한 자극은 나를 익히지만, 너무 과한 아픔은 내 안의 무언가를 태워버리기도 하거든요.
누군가 곁에서 잘 데워주고, 타이밍 맞춰 불을 꺼주는 따뜻한 손길이 있을 때, 그 고비는 겨우 자극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손길 없이 혼자 오래 불 위에 올라가 있으면, 그건 그냥 아픈 화상이 되고는 합니다.
진료실에서 만난 아픔들 앞에서, 저는 결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청춘이니까 아픈 거야.”
이런 말은, 지나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진료실에서는 때로, 너무 무거워 입 밖에 내기도 조심스러운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그 고통들 앞에서는, ‘힘내세요’보다 ‘그건 정말 힘든 일이겠어요’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게 그 순간엔 더 진짜인 것 같더라고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아픔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아프니깐 청춘이야!"라기보다는 (그것을 애써 의미 있게 해석하려 하기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프다. 이건 힘든 일이다. 나한텐 너무 과했다.”
저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진짜 회복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아직 회복 중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에게도 아직 글로도 꺼내 쓰지 못할 경험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머릿속 어딘가에 조용히 밀어둔 채, 여전히 조심스럽게 삭히는 중이죠.
어떤 일은 그냥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고,
어떤 경험은 저를 더 날카롭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정말 그 일들이 저를 단단하게 만든 걸까요?
음...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모가 생긴 느낌이랄까요?
모난 성격, 모난 자존감, 모난 말투...
가끔은 샤워하다가 문득 괴로운 순간들이 떠오르면, 저도 모르게 ‘아오!’ 하고 크게 소리칩니다.
화장실 밖 사람이 놀랄까 봐 민망할 정도로요.
아직 제 안에 회복되어야 할 일들이 마음속에 남아있어서 그럴까요?
그럴 때면 “그냥, 조금만 덜 아프게 성장하면 안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고는 합니다.
우리는 참는 걸 미덕으로 여기고, 견디는 걸 강함으로 칭찬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 그런 사람보다 때로는 도망칠 줄 아는 사람, 울 줄 아는 사람, 쉴 줄 아는 사람도 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순간들이 있어야 무너질 때 무너지고 다시 일어날 줄 아는 유연함 이 생겨 날 테니깐요.
꼭 아파야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청춘입니다.
저도, 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도, 저에게 오는 환자분들도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는 여러분도,
그러니 부디, 너무 아프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이런 아픔이 없어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괜찮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