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판도라의 상자
태준을 생각하면 내 찬란했던 20대가 떠오른다. 나의 30대도 그와 함께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남들과 다름없는 적당한 시기에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편안한 그와 함께 결혼하고, 그와 나를 닮은 아이도 낳고. 남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며 지지고 볶고 그렇게 살거라 생각했다. 6년을 만난 그와 헤어지고 연하남의 적극적 대시를 받으며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수도, 어이없어 할 수도, 복에 겨웠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다. 죽을 때까지 진짜 사랑이 뭔지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이란 걸 해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나. 사랑이란 걸 못 해보고 죽으면 어쩌지?”
“뭐?”
“사랑이 뭔지 모르고 죽으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니. 네 이야기를 듣고 더 확실해졌어. 나는 사랑이 뭔지 몰랐던 거야.”
“미안해. 잘못했다고. 너 나 미안하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고요한 내 시선에 그는 아차 싶은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는 미안함에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게를 숙인다.
“미안해. 네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지 몰랐어.”
이미 열린 판도라의 상자는 죄악과 의심과 불확실을 나에게 뿌렸다. 문제는 희망이다. 내가 열어본 상자 속에 희망이란 게 남아 있을까? 심각한 내 모습에 그도 더는 만나자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 너는 좀 기다려야겠다. 내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날 다시 보자. 진정한 사랑을 울부짖으며 나는 기억을 잃었다.
역시 술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진정한 사랑이고 뭐고 진정한 해장이 필요하다. 아. 속 쓰려.
“일어났어?”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문뜩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술을 얘랑만 마시나. 왜 매번 이놈의 상쾌한 목소리를 듣고 오금이 저려 일어나게 되는지. 진지하게 살아온 인생과 인간관계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응.”
“자. 마셔.”
“고마워.”
다시 이 따뜻한 집을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집아 잘 있었니? 오랜만이야.
주방에서부터 금세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걸 보면 그는 또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드나 보다. 오늘은 뭘 만들어 주려나. 이렇게 자꾸 적응이 되면 그가 없을 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렇게 잘해주는 건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려는 그의 계획이 아닐까. 이런 머리 좋은 놈.
“밥 먹으러 와.”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못 이기는 척 침대를 벗어난다. 그래. 아무렴 어떠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천천히 배워서 다시 할 수 있게 만들면 되지.
그가 만들어준 따뜻한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사귄다고 지금 이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변할까. 지금처럼 똑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더는 나쁜 사람이고 싶지 않다. 더 하다가는 정말 지옥에 갈 것 같다.
“우리 사귈까.”
“어. 어?”
“만나보자고.”
“너는 그걸 밥이 너무 맛있다처럼 이야기하냐.”
“그럼 뭐라고 해. 그대 나와 만나주겠소?”
“알겠소. 그대의 청을 받아들이겠소. 그러니 밥이나 마저 드시오.”
또 그는 놀라지 않는다. 이 놈은 뭐지? 어떤 놈인 거지?
“너는 내가 승낙할 줄 알았나 봐? 그렇게 감동을 받지는 않네?”
“감동받았어.”
“그래? 왜 이렇게 차분하고 덤덤해? 막 좋아 죽어야 되는 거 아냐?”
“너무 좋아. 너무 감동이야.”
찝찝하다. 그의 반응은 내가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다. 이건 엎드려 절 받기네.
“와 짜증 나. 너 연기력이 빵점이다.”
“밥 먹고 뭐 할까?”
“우리? 영화 볼까?”
“그래.”
그의 얼굴에 피는 미소는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러다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함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나?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내가 그의 집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언제나 약간씩 날이 서 있었고, 일어나서는 부랴부랴 집으로 가기 바빴다. 그런 우리의 관계에서 마음 편하게 영화를 보는 2시간 정도의 오붓한 시간은 사치였다. 그의 쑥스러워하는 미소를 보니 그는 나와 이런 소소한 것들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그렇게 해줄걸. 뭔가 죄책감과 미안함이 몰려온다.
“미안.”
“왜? 갑자기?”
“그냥 네가 좋아하는 거 보니까. 내가 이 집에 많이 왔었지만 너랑 영화를 본 적이 없었네.”
“미안해하지 마. 난 지금이 중요해.”
밥을 먹고 우리는 함께 영화를 골랐다. 영화를 고르며 알게 된 건 그와 나의 영화 취향이 조금 다르다는 것. 나는 영화에서 돈냄새가 나며 무언가 터지고 다치는 판타지 영화를 좋아한다면, 그는 슬프고 절절한 사랑이야기가 들어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이렇게 몰랐던 그의 조각을 찾아내는 것이 생각보다 좋다. 한창 그의 조각을 찾아내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고개가 탁 들린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서로가 낯설다. 그에게서 내가 몰랐던 낯선 향기가 느껴진다. 이제야 나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우리 서로를 참 몰랐구나.”
“응?”
“나는 너를 잘 몰라도, 너는 나를 정말 잘 안다고 생각했거든?”
“잘 알아.”
“아니. 넌 나를 하나도 몰라.”
“뭘 모르는데?”
“그냥. 전부다.”
그는 내 말을 부정하더니 이내 영화를 고르느라 열중했다. 그는 아주 신중하게 영화를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