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렸던 퇴근시간 회사 밖을 나서는데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온다. 6년을 봤으니 삭제해도 누구의 번호인지 바로 알아차리는 건 파블로프의 개 실험인 조건반사와 같은 거다.
-여보세요.
-응.
-전화받네.
-응.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야?
-아...
-할 말 없으면 끊을게. 그리고 연락하지 말아 줄래?
-우리 만나자.
-우리 헤어진 거 아니었어?
-만나서 이야기 좀 해.
-나는 할 이야기가 없어.
-내가 할 이야기가 많아. 만나자. 회사 앞이지? 지금 갈게.
-회사 앞 카페로 와.
-금방 가. 조금만 기다려줘.
이야기를 끝내고 나는 그를 기다렸다. 창에 비친 내 모습은 생각보다 담담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여자의 설레는 표정은 없다. 그저 따분하고 지루한 표정을 한 여자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와 몇 년째 되는 날부터 이 표정으로 그를 기다렸을까. 그는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설레는 표정을 하고 그 사람을 기다렸던 때가 있었겠지.
“미안. 빨리 온다고 왔는데 많이 기다렸지?”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무슨 일인데?”
“우리 다시 만나자.”
커피가 나오기 전에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다니. 그답지 않다. 그는 마음먹은 것을 쉽게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급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다. 나와는 다른 그의 느긋함과 신중함이 좋았다. 그의 여유로움은 항상 나를 안달 나게 만들었다.
“헤어지자고 한건 너야.”
“알아. 근데 나 너랑 못 헤어져.”
“왜? 너는 결정을 쉽게 바꾸거나. 결정을 쉽게 내리는 사람도 아니야.”
“내가 잘 못 생각했어,”
“아니. 우린 끝났어.”
“헤어지자고 말한 거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다시 시작해. 내가 너무 경솔했어.”
“너는 왜 항상 네 마음대로야? 난 너랑 다시 못 만나.”
“나 아직 너 사랑해.”
“너 지금 최악이야. 너답지 않아. 네가 헤어지자 했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왜? 6년이라는 시간이 이제야 실감 나? 네가 그렇게 쉽게 말할 시간이 아니었어. 내가 만만해?"
"아니야."
"네가 나 놓은 거야."
커피가 나왔지만 그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내 말을 들을 그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해.”
“좋은 여자 만나. 나 먼저 갈게.”
"너 혹시. 그 친구라는 남자 아직 만나?"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그를 뒤로한 채 카페 문을 나섰다. 그는 왜 갑자기 나를 잡는 걸까. 그리고 왜 기정의 이야기를 꺼냈을까. 그는 나와 기정의 사이를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걸까. 나도 몰랐던 내 시선을 그는 알고 있었나. 갑자기 무서워졌다. 내 시선을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면 나는 두 사람에게 정말 용서받지 못할 나쁜 사람이다. 오늘 잠은 다 잤네. 하나님께 기도드려야겠다.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지옥에 갈 거 같은데 그래도 조금은 덜 고통스러운 곳으로 보내 주시라고.
역시나 잠은 오지 않는다,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과활성화된 뇌는 생각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이별 후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아픈가? 아니오.
그와의 6년이라는 시간이 아까운가? 아니오.
그가 나 말고 다른 좋은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는가? 네.
그에게 예쁜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질투가 날까? 아니오.
질문에 답하면서 기정이 나에게 한 말이 어렴풋이 이해된다. 나는 태준을 사랑했던 걸까? 내가 지나왔던 6년이란 시간은 사랑이 맞는 걸까?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태준은 나를 사랑했던 걸까. 태준은 나를 매번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는 그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나. 내가 했던 사랑은 진짜가 아니었나. 내가 사랑을 잘 못 배운 건 아닐까. 그런 그는 이런 나와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한다. 복잡한 생각은 전화 진동소리로 끊어졌다.
-여보세요.
-뭐야. 전화받네?
-받아도 난리야.
-신기해서. 많이 화난 줄 알았는데.
-화 많이 났어. 나 오늘 태준이 만났어.
-헤어졌는데 왜 만나?
-다시 만나제.
-미친놈이네. 그래서 너는 어떤데?
-나는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어.
-그래?
-근데. 나 정말 사랑이란 걸 했던 걸까? 내가 생각했던 게 사랑이 아니었으면 어떡하지? 내가 줬던 게 내가 배웠던 게 사랑이 아니면?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그를 사랑했던 걸까?
-나 때문이구나?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런 거 아냐.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미안해. 정말.
-내일 만나서 내 고민 진지하게 들어줘. 물론 술은 미안한 네가 사고.
-알겠어. 내일 봐.
그는 생각보다 굳은 표정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엄청 반가워하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두운 그의 표정에 술을 먹기 전부터 술맛이 떨어진다.
“왔어?”
“응.”
“무슨 일 있어? 너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 누가 보면 네가 이별한 줄 알겠다.”
“미안.”
“괜찮아. 너 때문이 아니야.”
그는 역시 너무 착하다. 따지고 보면 다 내 탓이고 잘못이다. 내가 바보같이 행동했고, 내가 두 사람을 이용했다. 그런데 되려 이용당한 사람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꼴이라니. 이래서 사기꾼들, 가해자들, 잘못한 사람들이 뻔뻔하게 당당한 건가. 세상이 말세다 말세.
“그래서 답은 찾았고?”
“아니 아직.”
“그럼 내 질문의 답은?”
“무슨?”
“내가 너 좋아한다니까.”
“응. 고마워.”
“그게 끝이라고? 그냥 나랑 만나. 사랑이 뭔지 나랑 만나면서 같이 찾아.”
그의 해맑은 눈을 바라보면 내가 훨씬 죄스러워진다. 저 순수한 영혼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너랑 만나면 내가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