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란콩 Nov 03. 2024

그냥 소설

3화. 보편적이지 않은 이별

그는 잠깐 나를 감상하고 주방으로 갔다. 나는 물먹은 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바로 누웠다. 곧이어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울렁거리는 속이 잠잠해지고 제 기능을 하는 것처럼 꼬르륵 거린다.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 이 정도로 속이 안 좋으면 하루쯤은 굶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지혜야. 이제 그만 일어나서 밥 먹자.”

“안 먹어.”

“이상한 자존심 부리지 말고 빨리 와.”

“안 먹어!!”

“빨리 씻고 와. 너 배에서 들리는 꼬르륵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를 이길 수 없다. 그는 나를 너무 잘 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모두 파악한 것 같다. 그 사실을 되뇌고 나니 더는 고집을 피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미 진 싸움은 재미가 없다. 얼른 씻고 나서 따뜻할 때 먹어야지.     



“와! 잘 먹겠습니다.”

“오냐.”     



그의 음식은 그를 닮았다. 적당한 간에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속이 편안해지는 그런 맛. 맛있다는 생각보다는 가끔 생각나는 맛. 우드톤의 정갈하게 잘 정돈된 그의 집과 주방도 그와 똑 닮았다.    

  


“그래서 오늘의 기분은?”

“음. 어제보다는 괜찮다?”

“내 생각보다는 잘 버티는 건지. 아니면 진짜 괜찮은 건지.”

“응? 뭐가?”

“나는 6년 동안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너처럼 이렇게 덤덤하지 못할 것 같은데.”

“내가 덤덤해 보여?”

“응.”

“어떤 점이?”

“그냥. 보고 싶다고 괴로워하지도, 그렇다고 대성통곡하지도, 미련이 남아서 전화나 메시지를 남기지도 않으니까.”

“그런가.”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본다. 이별하면 어때야 되는데? 아! 드라마에서 본 이별은 여주인공이 남자를 처절하게 붙잡거나, 울고불고 매달리거나, 줘 팬다거나 그러던데. 내 반응과는 확실히 다르다. 나도 화끈하게 빰을 한 대 날리고, 물컵에 물을 얼굴에 쏟아버릴걸 그랬나. 근데 그게 무슨 소용이지. 끝났는데.    

  


“뭐. 어떤 이별을 상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이별했는데 무슨 소용이야.”

“그래?”

“응. 그 사람과 내 관계가 끝이 났는데.”

“넌 가끔 너무 차가워.”

“내가? 꼭 이별을 요란하게 해야 되니?”

“그건 아니지. 근데 6년을 만났고 너는 차였잖아.”

“그래서?”

“그런데 화도 눈물도 안 나?”

“나 집에 갈래.”     



내가 보편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덜 사랑했고, 이별에 덜 아파하는 게 아니다. 나를 다 안다는 저 말들에 화가 난다. 그는 나를 다 아는 게 아니다. 나를 얼마나 안다고 저렇게 함부로 이야기하는 걸까. 내가 얼마나 만만하면.      



“야! 이거 다 먹고 가.”

“싫어. 입맛 없어.”

“데려다줄게.”

“아니. 혼자갈래.”

“왜 그러는데?”     



그의 마지막 말을 무시하고 침실로 향했다. 내 짐과 들을 챙겨서 거실로 나왔다. 그는 거실에서 나를 보고 서 있었다. 그를 지나쳐 현관으로 향했다. 몇 걸음 이동하고 잡힌 손목에도 내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손목을 뿌리쳤지만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나 보다. 허옇게 질린 손목을 보고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  

    


“놔.”

“싫어.”

“놓으라고 했어.”     



그의 얼굴은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미안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의 감정이 무슨 상관일까. 나는 지금 기분이 매우 나쁘다.     



“안 놔?”

“왜 그러는데!”

“넌 내가 만만하고 쉬워?”

“누가? 네가?”

“응. 넌 내가 만만하고 쉽지.”

“아니. 한 번도 쉬웠던 적 없어.”

“그렇지 않으면 6년의 연애를 끝낸 사람을 앞에 두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 마음을, 그리고 그 사랑의 끝을 마주한 내 마음을.”

“그런 거 아냐. 그게.”

“너한테 나는 그런 여자인 거야. 그렇게 말해도 상처를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그런 여자.”

“아니라고 그런 게!”

“됐어. 간다.”     



그에게 잡힌 손목을 억지로 떼어내고 나는 그를 지나쳐 현관으로 향했다. 내가 신발을 신으려 그의 쪽으로 돌아섰을 때 그는 물에 젖은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너는 나한테 한 번도 쉬웠던 적 없어. 오히려 쉽다고 생각한 건 너였겠지. 너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을 누가 쉽다고 생각해?”     



그 말에 순간 신발 신는 법을 까먹었다. 멈춰버린 시간의 흐름을 깬 건 계속되는 그의 외침이었다.     



“난 언제나 네가 어려웠어. 너는 내가 쉬었을지 모르지만. 나 너 좋아해.”     



이렇게 그의 마음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지금과 같은 이 관계가 계속되길 바랐다. 너무 큰 욕심이었나. 역시 신은 내편이 아니다.      



“너 다 알고 있었잖아.”     



그의 절절한 외침에 마음이 아프다. 나는 진짜 최악이다.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 감히 수습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미 나는 그에겐 최악이다. 이왕 최악인 사람이라면 그냥 쭉 그래야겠다. 해결하기도 싫고 귀찮다. 나는 항상 이기적이다. 역시 불편한 분위기는 회피하는 게 상책이다.      



“미안. 당분간 만나지 말자.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     



그 말을 남기고 나는 그 집을 나왔다. 이제 우드톤의 따뜻한 집도, 내가 좋아하던 은은하게 반짝이는 귀여운 조명도 못 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에 그 조명을 선물로 달라고 조를걸.      

이전 02화 그냥 소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