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취기를 빌려
울렁거리는 속에 어제의 일이 후회로 밀물처럼 밀려든다. 이제는 일어나야 한다. 천천히 눈을 뜨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머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 젠장 오늘 하루는 이걸로 끝이다.
“일어났어?”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시간 낯선 공간에서 들려오는 건 아주 소름 돋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았다. 이건 공포영화 보다 더 오금이 저리다.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애써 부정하며 내 시선은 천장에 머물러 있었다.
“너 괜찮아?”
한 번 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유롭게 들리는 저 목소리가 너무 얄밉다.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짜증이 올라오며 머리가 찌르르 거린다. 겨우 틀어막고 있던 속이 크게 울렁거린다. 밝고 상쾌한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얄밉다. 나도 가만히 누워 있기가 싫다. 평소와 똑같은 내 목소리를 찾아 건넨다.
“어제 우리 무슨 일 있었어?”
아무 대답이 없다. 그리고 곧 그의 숨소리가 불규칙해진다. 그 숨소리에 딸려오는 그의 시선은 보지 않아도 끈덕지게 내게 붙어있겠지. 몇 분이 지났나. 그는 불규칙한 숨을 내뱉다, 잠깐 숨을 참고는 다시 크게 숨을 내쉰다. 한숨이 들리고 다시 그의 호흡은 규칙적이게 변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의 말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단지 누군가의 확인이 필요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우리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확인. 우리 사이가 변하지 않는다는 확인. 너와 나는 친구사이라는 확인. 우리 사이는 예전과 똑같을 거라는 확인.
“그래. 근데 나 죽을 것 같아. 속이 너무 안 좋아.”
“그러니까.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멀쩡하면 사람이냐?”
그의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너무 나쁘다. 내가 나쁜 만큼 그는 너무 착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제 일을 머리 아프게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야겠다. 나는 이미 나쁜 사람이니까. 그래서 벌로 6년 연애의 이별을 선물 받았나.
“일어날 수 있겠어?”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따뜻한 꿀물이 들려있다. 컵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게 하는 저 액체가 꿀물일 거라는 확신은 매번 이런 상황에서 꿀물을 가져오는 그의 행동이 습관과도 같아서 이다.
“고마워.”
“너는 그래도 된 사람이야. 매번 고맙다는 말은 하네.”
그의 걱정 어린 눈과 웃고 있는 입이 참 그럴듯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며 나는 꿀물을 후후 불어 한 모금 홀짝 마셨다. 그리고는 정말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달디단 꿀물에 시선을 두었다.
꿀물을 한 컵 비우고 이제야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본다. 전화나 문자가 없다. 한 번 더 이별이 실감된다. 맞다. 이제 그는 나를 걱정해 줄 이유가 없다. 우리는 남이니까.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게 이렇게 서러울 수가 있나. 그 억울함과 서러움에 눈앞의 화면이 스멀스멀 흐려진다.
따지면 나는 잘 살고 있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그놈에게 얻어맞은 건데 왜 나만 아픈 건지 서럽고 억울하다. 이별을 고한 그놈은 아주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했겠지. 맛있는 아침도 챙겨 먹었겠지. 그리고 오늘은 휴일이니 그놈이 좋아하는 게임도 원 없이 하며 놀다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서 부어라 죽어라 술을 퍼마시겠지. 잔소리하는 사람도, 걱정하는 사람도,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으니 얼마나 좋을까. 애라이 술 먹고 집에 가다 어디 확 넘어져서 비명횡사해 버려라!!
마음속으로 열심히 저주를 퍼붓고 있는데 피식하는 웃음이 들린다.
"너 표정이 왜 그래? 또 무슨 상상하냐?"
"뭐!! 내 표정이 뭐!!"
표정에서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붓는 중임을 들켰나 보다. 이왕 들킨 거 아주 나쁜 저주를 빌어줘야지! 칫! 유치하면 유치원에 가시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