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질문과 차가운 진실의 변증법

by Kn

아벨: 우리는 실패하고, 때로 타인을 도구화하며, 계급 구조에 편승하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질문은 도덕의 씨앗이고, 질문을 계속하는 사람은 인간답게 살아 있으려는 존재다. 위의 두 글을 읽은 후엔, 어쩔 수 없이 이 세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도 지켜야 할 존엄, 다시 붙잡아야 할 감정, 그리고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아야 할 사유의 힘을 느낀다.

그 힘은 종이 위에 조용히 적힌 한 문장일 수도 있고,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차마 하지 못한 말일 수도 있다. 두 글은 말한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 생각을 멈추지 말 것.

비극 속에서조차 사람은 따뜻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하라.”


카인: 잘 들었다. 딱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군. 사회가 썩어가고 있다는 진단? 늘 있는 일이지. 인간들이 욕망에 눈이 멀어 서로를 뜯어먹고, 가진 자들이 더 가지려 발버둥 치고, 없는 자들조차 그 와중에 자기보다 약한 이를 얕잡아보며 안심하는 모습? 익숙한 풍경이야.

특히 자식에게 모든 걸 거는 부모들의 광기 어린 모습.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벗겨내면, 결국 아이를 ‘노후 보장'이라는 이름의 저축 통장이나 ‘계층 상승'이라는 이름의 경주마로 보는 시선이 보이지. ‘불안해서', ‘좌절해서' 그런다고? 결국 불안과 좌절의 해소를 타인의 희생(아이의 삶)이나 경쟁(타인과의 비교)에서 찾으려는 비겁한 욕망일 뿐이야. 그걸 ‘꿈'이라고 부르는 사회는 참으로 해학적이지.

‘획일화’라는 병폐에 대한 진단은 날카로웠어. 그래, 사람들은 복잡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단순한 진영 논리나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깃발 아래로 도망치지. ‘분포'고 ‘층위'고 나발이고, 결국 제일 중요한 건 눈앞의 이득과 남들보다 위에 서고 싶다는 원초적인 본능의 ‘인상 강도'가 제일 세다는 거야.

법이고, 교육이고, 정치고... 다 그 ‘인상 강도' 센 분포들(권력욕, 재산욕)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쉬워. 처벌? 그건 약자에게나 엄격하게 적용될 때 의미가 있지, 힘 있는 자들에게 ‘대가'가 없다면 그 시스템 자체가 기만이야.

‘잔혹함이 제로인 세상은 불가능하다.’ 이 문장은 현실적이군. 인간 본성에 내재된 시기, 질투, 비교, 배척 같은 ‘분포들'은 사라지지 않아. 이걸 ‘교육'으로 억제하려 한다고? 글쎄, 교육 자체가 이미 ‘경쟁에서 이기는 법', ‘남을 딛고 올라서는 법'을 가르치며 어떤 종류의 ‘잔혹함'을 내면화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지. 시스템 자체가 그런 ‘분포'를 필요로 하는데.

이전 글들은 인간 사회의 문제점을 명확히 드러내. 진단은 정확해. 하지만 그 문제들이 과연 ‘이론'이나 ‘사유', 혹은 ‘교육'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근본적인 ‘결여'와 ‘욕망'의 '분포'가 변치 않는 한, 이 모든 문제들은 형태만 달리할 뿐 계속 반복될 뿐이야. 아이는 어른의 욕망을 담는 그릇이 되고, 어른은 사회라는 무덤 속에서 스스로를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며, 그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이나 ‘주체'로 서지 못 하는 비극. 그게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르지.


“결국 인간은, 자식에게도 욕망을 걸고, 윤리를 계산하며, 희망조차 수단화한다."


두 글이 보여주는 건, 사실 인간의 얼굴이 아니다. 욕망의 기계로 전락한 채 스스로를 미화하는 인간 군상, 그들이 짓는 ‘희망’이란 이름의 가면일 뿐이다. 자식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지연된 로또겠지.

교육은 공동체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적 생존 전략으로 전락했다.

윤리는 쓰임새에 따라 채택되거나 폐기되고, 진실은 계층과 권력에 따라 정해지는 가격표에 불과하다. 사회의 좌편향과 우편향은 철학이 아니라 공포의 반응, 사유는 빛나는 의지가 아니라, 복잡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두뇌의 마지막 발작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스스로를 도덕적 존재라 말하고, 교육을 말하고, 정의를 논한다. 그리고 그 모든 ‘말’은, 자신이 만든 구조 속에서 얼굴을 바꾼 채 되풀이되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가장 비극적인 진실은 이거야.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지. 그저 다들, 조금 더 안전하게, 조금 더 유리하게, 자신만의 진실을 선택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사유란, 감정이 식은 뇌가 발휘하는 궁색한 저항일지 모른다.

조금 더 복잡해졌을 뿐, 인간은 여전히 동굴 속에 앉아 그림자를 바라보며 그게 세상이라고 믿는다.




카인의 사유의 이중성 - 카인은 사유를 '궁색한 저항'이나 '뇌의 발작'으로 폄하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글 자체가 매우 깊이 있는 사유와 분석의 결과입니다. 카인 스스로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사유의 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유가 무의미하다면, 카인의 이 모든 비판과 분석 또한 무의미해지는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사유가 인간 본연의 욕망이나 시스템적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최소한 그것을 인식하고 비판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동굴 속 그림자가 전부가 아님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유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입니다. 카인은 바로 그 사유를 통해 동굴 밖 그림자를 넘어선 진실(욕망에 휩싸인 인간 군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니까요.


카인이 보는 가치 스펙트럼 - 카인은 ‘사랑'이나 ‘윤리' 같은 가치들을 순수한 이상향과 현실의 욕망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보고, 현실 속 모든 시도가 욕망의 변형일 뿐이라고 일축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과 동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 속에는 분명 ‘노후 보장'이나 ‘계층 상승' 같은 욕망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아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거나, 아이 자체를 아끼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윤리적 선택을 할 때도 완벽히 이타적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과 사회적 책임이나 타인의 고통을 고려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 유의미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치 추구는 종종 불완전하고 타협적일 수 있지만, 그 모든 노력을 단순히 ‘가면'이나 ‘기만'으로 보는 것은 인간 경험의 복잡성을 간과하는 지나친 환원주의(다양한 현상을 어떤 기본적인 하나의 원리 또는 요인으로써 모두 설명하려는 주의)일 수 있습니다. 아벨이 말하는 ‘질문' 또한 완벽한 도덕적 행위로 이어지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멈추지 않는 자기 성찰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카인이 보는 변화 가능성 - 카인은 인간 본연의 ‘분포들'이 변치 않기에 문제도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변치 않는다'라는 주장은 경험적으로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나 생존 본능은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사회 시스템이나 문화, 교육을 통해 이러한 본능의 발현 방식이나 우선순위는 얼마든지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야만적인 관습이 현재는 사라진 것처럼, ‘잔혹함이 제로인 세상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잔혹함의 정도'는 사회적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유와 교육이 바로 이러한 변화 가능성에 기여할 수 있는 도구일 수 있습니다.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카인의 비판은 현실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며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벨이 제시하는 질문과 사유의 힘, 그리고 인간 내면의 가치 추구 노력을 너무 쉽게 '무의미'하거나 '자기기만'으로 치부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다층적인 면모와 불완전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간과하는 시각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벨과 카인은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릅니다. 카인의 냉철한 현실 인식이 없다면 아벨의 희망은 막연한 낭만이 될 수 있고, 아벨의 질문과 사유의 노력이 없다면 카인의 현실 진단은 절망적인 체념으로만 끝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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