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없는 단상 -1
드디어 시험 기간이 끝. 그리고 끝난 기념으로 미뤄왔던 이방인을 읽었다..
소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준다. '강렬한 첫 시작은 이런 거야.'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강렬하게 첫인상을 남기는 법에 이어서...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들려주는 '보편적 인간의 모습'
도덕적으로 어긋난 사유를 과감하게 뱉어내는 흔적. 그리고 가기에 거부감을 느끼며, 동시에 사로잡히는 이중성과 모순..
죽음에 귀찮게 반응하는 자본에 잠식된 까끌한, 또 흔한 영혼. 덤덤하고 담담한(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영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을 체득한, 어쩌면 그런 척할 수밖에 없거나 그래야만 해서 그렇게 된 영혼.. 두려움과 불안감에 극도로 예민해지는 영혼들까지..
매번 비슷한 상황을 겪고, 비슷한 반응, 비슷한 생각, 거부할 수 없는, 거부하기 힘든 그 거대한 죽음이란 흐름에, 장례식이란 절차에 기대어 터져 나오는 유사한 반응과 말들, 침묵, 끄덕임, 받아들임.
이제는 죽음을 보고 슬퍼하는 울음조차도 타인을 향함과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삶, 친구들을 동시에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앎 중에 몇몇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데, 이 앎도 그런 종류의 앎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만약 그가 무너지고 슬피 우는 모습을 보인다면 양로원 사람들과 성직자는 그를 위로하며 행복함과 만족감을 느꼈을까?
담담했던 슬픔의 형상도 위로는 갈구한다. 그것은 욕망과 뒤섞여 있고 묘하게 뒤틀린 위로라는 신호를 포착하게 한다.
가족은 첫 시작의 싱그러움, 푸르름이 옅어질 무렵, 운이 좋다면 새롭고 파릇파릇한 예의 그것들을 되살릴 수 있는 걸 다시 가족에게 던져준다. 그러나 그 운은 만들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떨어진 싱그러움이거나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여전한 푸르름일 것이다.
조금씩 삶의 균형이 틀어지는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시기. 이 소설엔 이웃과 교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머니를 여의고 인간성의 상실이 점점 진척되는 와중에도 그는 이웃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거기에 응한다. 그러나 그 응답엔 비밀스러운 귀찮음과 이용이 뒤섞여.. 과연 그것이 좋은 것인지, 실은 좋은 것까진 아니었던 것인지 의미 없는 물음을 던지게 하고, 품고 있게 한다. 그런 삶의 흔적은 나에게 그리움일까, 그저 단순한 과거의 짙은 향기일 뿐일까, 매서운 그림자일까, 다시 돌아올 시대의 흐름일까.
ㅋㅋ 공짜 초대란 없다. 뫼르소를 초대한 창고 감독 친구는 자기가 당한 일, 즉 여자친구의 배신을 , 그 배신당한 울분을 배출할 근사한 통로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거기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마음에 드는 친구를 얻고자 하는..
나는 이 초대받아 식사를 하며 베르몽의 말을 듣고 반응하는 뫼르소 모습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 차리기 귀찮아 호의에 응했던 그와 대접을 대다로 울분을 아무런 상관도 없는 주인공에게 털어놓는 이웃.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의 본질을 보는 것 같은 이 장면. 그래, 시대가 바뀌어도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폭력성의 잔해. 배신한 여성을 향한 폭력. 시대가 많이 달라졌음을 볼 수 있는 끔찍한 아픔을 아무렇지 않데 담아낸 흔적..
폭력이란 무엇인가. 힘 있는 자들의 권위, 타락, 복수. 교육마저 폭력을 집어삼켰던 시대의 토할 것 같은.. 역겨운 공시적 집필.
레이몽과 난봉꾼들. 그들은 무서우리만큼 폭력이 찍는 낙인의 위력을 잘 아는 자들이다.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 방법을 배우거나 터득한 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지금도 무수히 존재한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인간의 본질 증 취약한 약점을 간파한 흔적은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비워내고, 털어내지 못한 채 짙은 흉터로 남아 타자를 위협한다.
그 흉터에 걸려 넘어질 수많은 이들은 또 다른 흉터로 남아 존재하고, 존재해 낸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사라져 간다.
살라마노 영감의 개 이야기.. 동물권의 ㄷ자도 없던 그 시절. 소유물이었던, 감정의 배설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성의 흔적이었던 동물. 여성 학대가 자행되던 시기 동물은 오죽했을까..
참담했던 시대를 살아온 나이 든 이들에게 위로의 건배를,
죽어간 수많은 동물 학대 피해 동물들에게 깊은 애도와 추모를..
그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간, 견뎌내며 버텼던, 버티다가 망가져간 모든 영혼을 위한 위로의 건배를...
공권력에 종사하는 이들은 보통의 사람들은 통과하기 어려운 체력 테스트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이겨내며 자신들의 힘을 조금씩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이들을 상대하게 하는 시험에서 살아남아 선택받는다.
그 후 그들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을 보호하며 때로는 몇몇 이들에게서 우월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이후의 길은 갈릴 것이다. 정의로운 수호자가 될 것인가, 우월성에 잠식당하여 점차 그것의 노예가 되어갈 것인가, 이성의 위력에 취하여 합리화의 귀재가 되고 위로 더 위로 올라갈 것인가.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 아니, 이해를 거부하고 알면서도 역겹다고 치부하는 지점. 학대를 하는 이들의 방식은, 애정을 갖고 대하며 정드는 것과 실은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없다는 것.
단지 한 인간의 경향성, 타고난 성질, 자라온 환경, 박힌 교육 등의 영향으로 폭력글 행하지 않고, 다정하게 대해주어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단지 그런 이들일 뿐이며, 그들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실은 사랑을 주고 정을 주고 있었다는 그 참담하고 참혹한 지점.. 지독한 악취라며 외면하려 했지만, 실은 다 이해하고 안다는 것의 불쾌함이 나를 잠식해 가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정말 싫고, 또 싫은 그런 앎.
주인공이 들었던 평...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일로 주변 사람들이 안 좋게 생각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정작 뫼르소는 전혀 얼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상황.. 그리고 담담하게 '돈'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그...
어쩌면 그 지점이 베르몽이 뫼르소에게 느낀 호감의 원천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부분..
아직은 중간이라 알 수 없지만, 그는 원래 그렇게 덤덤한 이였을까, 아니면 수많은 상황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간 걸까. 견뎌야 살 수 있다는 무의식이 깔려있던 거라면 비극이라 불러야 할까, 코미디라 불러야 할까.
텅 비어 가는 주인공조차도 느끼는 정욕, 아름다움, 예쁨을 볼 줄 아는.. 살아남아 숨 쉬는 그 감각. 고통이 주는 공허를 사람인지 모를 존재를 통해 해체하고, 채워지고 다시 또 어쩔 수 없는 비워짐의 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