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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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첫 빛, 새로운 시작
달수는 요즘 들어 부쩍 아침이 기다려졌다.
이사한 지 한 달 남짓,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의 교외 아파트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그에게 아주 특별했다. 고요한 새벽, 언덕배기 아파트에 퍼지는 첫 햇살이 고스란히 그의 안방을 채웠다.
앞산은 낮고 푸르렀으며, 가까운 논에는 벼이삭이 누렇게 고개를 숙인 채 바람에 흔들렸다. '돋을양지'라 불리는 이 언덕배기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 달수에겐 어딘가 은근한 자부심이 되었다.
처음 이 집을 추천해 준 지인은 말했다.
"여기서는 해가 뜨는 걸 매일 볼 수 있어요. 아침마다 첫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죠."
그 말을 듣고 달수는 망설임 없이 이 집을 택했다. 그리고 이사 온 이후로 그는 매일 아침, 그 말이 얼마나 진실되었는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햇살은 조금씩 방 안을 채우며 그를 감싸왔다.
그날은 특히 더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달수는 자연스럽게 커튼을 걷었고, 황금빛 태양이 천천히 산 너머로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잠이 덜 깬 그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번졌다. 창밖의 풍경은 시골과는 다소 달랐지만, 이곳의 아침 햇살만큼은 어디에서나 동일한 따뜻함을 준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참 좋구나, " 달수는 혼자 중얼거렸다.
창가에 서서 그는 여유롭게 첫 빛을 맞이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놓치고 살았던 이 짧은 시간이 최근 들어 그에게 깊은 위로가 되고 있었다. 일에 치이고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을 잊고 살았던 시간들 속에서, 이 아침 햇살이 주는 따뜻함은 그의 마음을 사르르 녹였다.
달수는 이 햇살을 보면 가끔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했다. 어릴 적, 시골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보낸 그 아침들이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늘 이른 아침에 그를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달수야, 해 뜨는 걸 봐야 하루가 잘 풀린다." 할아버지의 그 소리는 아직도 선명하게 그의 귀에 맴돌았다. 그때는 그저 귀찮게 느껴졌던 할아버지의 말씀이 이제는 그의 가슴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 아침의 햇살이 주는 위안과 힘이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느껴진 것이다.
할아버지가 떠난 지도 오래되었지만, 달수는 매일 아침마다 그와 다시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창가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은 마치 할아버지가 여전히 그를 보살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달수는 그 빛을 받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오늘도 잘 될 거야."
그는 천천히 거실로 나와 커피포트를 켰다. 커피 향이 퍼지는 동안, 아침 신문을 펼치며 그 순간을 더 오래 즐겼다. 한때는 그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이사 온 후로 그는 이 작은 일상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게 되었다.
커피 한 잔과 아침 햇살, 그리고 잠시의 고요함. 그 모든 것이 달수에게 새로운 힘이 되어주었다.
달수는 이사 전만 해도 이런 여유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늘 도심 한복판에서 분주하게 살아왔고, 시간에 쫓기며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아침은 늘 분주했고, 알람이 울리면 허둥지둥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서둘러 집을 나서기 일쑤였다.
이사 후의 삶은 달랐다. 아침 햇살이 언덕 위 아파트를 부드럽게 비출 때면, 그는 느림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젠 그에게 아침이 단순한 하루의 시작이 아닌, 하루를 가득 채울 힘과 여유를 선물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날도 그는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며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방 안으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살을 다시금 눈에 담고, 달수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온 것이 우연일지라도, 그는 운명을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매일 아침, 그 첫 햇살이 그에게 주는 새로운 시작의 기운이 오늘도 그를 감싸 안았다.
차에 올라 출근길을 나선 그는 다시 한 번 아침의 기억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라디오를 켰다. 바쁜 도시의 흐름 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차분했고, 그 차분함이 그에게 하루를 견딜 힘을 주고 있었다.
"역시, 할아버지 말씀이 맞았어, "
그는 혼자 웃으며 속삭였다.
"아침 햇살을 봐야 하루가 잘 풀리는 거야."
달수는 또 한 번의 하루를 힘차게 시작했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