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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의 별빛이 내 마음 속에

청람 김왕식








밤하늘의 별빛이 내 마음 속에



청람 김왕식







가을은 언제나 시골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해주는 계절이다. 어릴 적, 시골에서 맞이하던 가을은 그 어떤 시간보다 따뜻하고 아늑했다. 아침이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집 앞마당에 나서면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들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할머니는 그 고추를 따서 말리자고 늘 말씀하셨다. 나와 동생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우리는 작은 손으로 고추를 한 움큼씩 따면서 서로 누가 더 많이 따는지 장난처럼 경쟁을 하곤 했다. 할머니는 장독대 옆 흙마당에 커다란 멍석을 펼쳐 놓으셨고, 우리가 딴 고추를 그 위에 하나하나 널었다. 고추가 멍석 위에 깔리면,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인 풍경은 마치 가을의 진한 냄새를 풍기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고추는 태양 아래에서 서서히 말라갔다. 처음엔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 붉게 빛나던 고추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바삭하게 변해갔다. 그 과정이 마치 우리가 서서히 자라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에서 고추는 투명한 속살을 비추며 살아가는 나날을 견디는 듯 보였다. 할머니는 고추가 잘 마르려면 햇볕을 골고루 받아야 한다며 고추의 위치를 이리저리 조정하시곤 했다.

마당 한쪽에서는 흰 빨래가 줄에 걸려 바람에 펄럭였다. 그 빨래는 고추만큼이나 시골의 가을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높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천이 바람에 흔들리며 깔끔하게 몸을 흔드는 모습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 평화로웠다. 그때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를 보면서 저 하늘 끝까지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 하늘 아래에서 나는 마치 아무 걱정 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가을은 그렇게 우리 가족의 일상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가끔 마을 어귀에서 멀리 보이는 가을 별들이 반짝이는 밤이면, 나는 할머니와 마루에 나란히 앉아 별을 바라보곤 했다. 할머니는 “가을 별은 사람의 마음을 말린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어릴 적 내게는 별이란 그저 예쁜 빛이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가을 별은 우리 마음을 말리듯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 주는 것 같았다. 삶의 아픔과 슬픔도 시간 속에서 말라가고, 그렇게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상처도 결국에는 투명하게 비추며 흩어져가는 것이리라.

가을은 언제나 그렇게 나를 말려주었다. 투명하게 비치는 고추처럼, 상처 난 욕망과 지나온 날들이 선명하게 드러났지만, 결국에는 그것들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시골에서 맞이했던 그 가을날들은 내게 그러한 깨달음을 선물해 주었다. 살아온 날들이 힘들었을지라도, 가을의 햇볕처럼 따스한 순간들은 우리의 슬픔을 어루만지며 치유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가을이 오면 여전히 마음속에서 그 고향의 풍경이 떠오른다. 투명하게 비치는 고추, 푸른 하늘에 펄럭이는 흰 빨래, 그리고 고요하게 빛나는 가을 별. 그 모든 것은 내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이자,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소중한 시간들이다.

가을이 올 때마다 그때의 고추 냄새와 바람에 흔들리던 빨래의 촉감, 그리고 밤하늘의 별빛이 내 마음속에 다시 찾아온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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