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Nov 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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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서정
청람 김왕식
늦가을이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슬그머니 옷깃을 세우게 한다. 코트 깃을 세우고 중절모를 눌러쓴 채 기차에 오른다. 무거운 일상에서 한 발 벗어난 듯, 짧은 도피를 꿈꾸며 발길을 옮긴다. 목적지는 없다. 고된 삶에서의 탈출구 같은 이 여행에 목적이란 사치일 뿐이다. 기차의 덜컹임을 느끼며, 그저 창밖에 흩어지는 풍경에 눈을 맡긴다. 산과 들이 바스락거리며 지나가고, 마지막 남은 단풍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역마다 머무는 기차는 바쁜 일상과는 달리 천천히 여유롭게 목적 없이 움직인다. 차장을 바라보며 눈에 들어오는 어느 한적한 마을에 내리기로 마음먹는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산들거리는 가을비가 얼굴을 적신다. 그 빗방울이 온몸에 스며들어 어느덧 마음까지 차분히 적신다. 아무런 목적 없이 걷는다. 낙엽이 깔린 길, 빗방울에 젖은 나무들의 향기가 공기 중에 퍼진다. 산들거리던 바람이 이제는 차갑게 몸을 에어오지만, 그 감촉이 오히려 더 고요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지쳐갈 즈음, 문득 불빛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어둑한 골목 끝에 자리 잡은 작은 선술집, 빗속에서 외로이 불빛을 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락한 따스함이 온몸을 감싼다. 허름하지만 정감이 가는 공간, 낯선 이들의 대화와 웃음소리가 살짝 스치는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탁주 한 병을 시킨다. 잔에 담긴 맑은술이 잔잔히 흔들리며 안도감을 준다. 첫 잔을 들이키며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들이 한순간 가벼워진다. 술이 몇 잔 더 들어가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수많은 이야기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선술집의 창밖으로 보이는 빗방울이 어느새 잦아들고, 빗물이 고인 길 위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비쳐온다.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 있다. 이 공간에서만큼은 어깨를 짓누르는 일도, 마치 유리조각처럼 아린 외로움도 잠시 잊을 수 있다. 잠시의 위로가 된 이 밤, 이 순간이야말로 중년의 가을이 선사하는 소소한 로망이 아니겠는가.
짧고 고요한 여행은 그렇게 다시 끝이 난다. 삶은 여전히 무겁겠지만, 지금 이 순간 느낀 편안함은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힘이 될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갈 때, 이곳에서 머금은 따스한 여운이 긴 시간을 함께해 주길 바라며, 차가운 바람을 안고 다시 돌아갈 기차에 오른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