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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겨울을 품다

김왕식








김장, 겨울을 품다




청람





김장철이다.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마을은 분주해진다. 김장은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이자, 온 가족의 정성과 땀이 모이는 순간이다. 마당 한가운데 빨간 고무장갑을 낀 아줌마들의 손길이 바쁘다. 널찍한 고무통에는 절여진 배추가 차곡차곡 쌓여 있고,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이 섞인 양념의 매콤한 향이 코끝을 찌른다. 이 냄새는 김장만이 품고 있는 겨울의 예고편이다.
수건을 머리에 두른 어머니들은 한 손에 배추를 들고 다른 손으로 양념을 듬뿍 발라가며 배추 속을 채운다. 허리를 굽히고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어진 자세가 몇 시간째 이어진다.

"허리야, 허리!"

탄식이 한 번씩 터져 나오지만, 손은 쉬지 않는다. 수십 포기 배추가 어머니의 손길을 거쳐 겨울 반찬으로 변신해 간다.
옆에서는 손님맞이 상이 차려진다. 뜨끈하게 삶은 돼지고기가 수북이 담긴 접시, 갓 담근 배추 겉절이가 함께 놓인다. 막걸리 한 잔도 빠질 수 없다. 고된 노동 뒤에 찾아오는 작은 즐거움이다.

"한 잔 하고 가요!"

한 마디에 웃음이 번지고, 고된 노동의 피로도 잠시 잊는다.
김장은 단순히 반찬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과 이웃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여러 집에서 가져온 배추가 한 곳에 모이고,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야 완성된다. 김장을 담그며 주고받는 이야기에는 각자의 지난 계절이 담겨 있다. 올해는 누가 아팠는지,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농사는 어땠는지, 모두 김장 양념처럼 버무려진다. 이런 대화 속에서 이웃의 소식이 공유되고, 서로의 삶에 위로가 더해진다.
그렇게 완성된 김치는 장독대에 가지런히 안착한다.

"올겨울도 잘 부탁한다."

어머니의 손길이 장독을 토닥이는 순간, 겨울나기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부터는 자연이 일을 할 차례다. 김치는 발효를 거쳐 시원하고 깊은 맛을 내며 겨울 내내 밥상에 오른다. 김치의 맛은 손맛과 시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손맛은 매년 조금씩 달라진다. 기후, 양념, 그리고 마음의 상태가 모두 영향을 미친다.

김장을 하며 느끼는 것은 단순한 노동의 피로만이 아니다. 고된 작업 뒤 찾아오는 뿌듯함과 함께, 어머니들의 지혜와 인내를 새삼 깨닫게 된다. 배추 한 포기에 들어가는 정성과 양념을 맞추는 세심함, 그리고 이를 가족의 건강으로 연결 짓는 어머니들의 사랑은 대단하다.
김장철의 풍경은 바쁜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잊히기 쉬운 전통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그 장면 속에는 가족과 이웃의 사랑, 삶의 지혜, 자연과의 조화가 모두 담겨 있다. 비록 허리가 아프고 손끝이 얼얼해도, 김장은 단순히 '김치 담그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우리 삶의 일부이며, 추억의 일부다.

올해도 김장은 그렇게 우리 곁에 찾아왔다. 빨간 고무장갑과 고춧가루, 삶은 돼지고기와 막걸리 한 잔이 어우러지는 그 풍경 속에서 우리는 겨울을 품는다. 김장은 그렇게 우리에게 겨울을 살아낼 힘과 따뜻함을 선물한다.

겨울을 품는 김장

김장철, 차가운 바람 속에
빨간 고무장갑이 춤을 춘다.
절여진 배추 속 양념이 스미고
매콤한 향기가 겨울을 불러온다.

허리 굽힌 어머니들의 손끝에서
배추는 겨울 밥상의 약속이 되고,
삶은 돼지고기와 겉절이 한 점에
막걸리 한 잔 웃음이 피어난다.

배추 속 버무려진 이야기들,
올해의 농사와 아픔과 아이들의 성장,
장독에 얹힌 어머니의 손길에
"올겨울도 잘 부탁한다"는 기도가 담긴다.

김장은 노동의 피로 너머에서
이웃의 정, 가족의 사랑이 되고
겨울의 깊은 맛을 품은 채
우리의 삶 한편에 자리 잡는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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