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04. 2025

저녁의 대화  ㅡ  시인 한강

김왕식






                            저녁의 대화


                                                   한강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

아니,
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거야,
해가 지고 밤이 검고
검어져 다시
푸르러질 때까지

혀를 적실 거야
냄새 맡을 거야
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
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
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

나직이, 더없이,
더없이 부드럽게.
그 노래에 취한 당신이
내 무릎에 깃들어
잠들 때까지.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
검푸른
그림자

* 제7의 봉인. 에 부쳐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저녁의 대화'는 한강 시인이 삶과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세밀하고 섬세한 언어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시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이를 초월하려는 의지 사이의 긴장을 "죽음"과의 대화 형식으로 풀어내며, 독자로 하여금 삶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 한다.

첫 행에서 시인은 죽음을 의인화하여 "뒤돌아서 인사한다"는 표현으로 죽음의 피할 수 없는 본질을 부드럽게 서술한다.
이어지는 "<너는 삼켜질 거야>"라는 선언은 죽음이 지닌 잔혹성을 직시하게 한다. 이러한 설정은 시의 중심에 자리 잡은 긴장감을 형성하며, 독자를 운명의 체스판으로 초대한다.

주인공은 "나는 삼켜지지 않아"라고 단호히 대답하며 죽음에 맞선다. 이 저항은 단순히 부정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강인함과 삶의 지속성을 표현한다.
"운명의 체스판"은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존재와 소멸 사이의 긴박한 대립을 상징하며, 시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대조적 이미지들로 구체화된다.
예컨대 "해가 지고 밤이 검고 / 검어져 다시 푸르러질 때까지"라는 구절은 절망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희망을 암시하며, 생명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과정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한강의 언어는 생생하다. "혀를 적시고 / 냄새 맡고"라는 행위의 묘사는 독자가 삶의 촉각적이고 감각적인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가도록 한다. 이어서 "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 / 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라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묘사는 감각적 풍요로움을 극대화하여, 죽음이라는 무게에 눌리지 않고 삶의 아름다움을 탐미하려는 시인의 태도를 담고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 "검푸른 그림자"는 다시금 죽음의 존재를 환기하지만, 이제는 한층 더 부드럽고 수용적인 태도로 변모한다.
이 변화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관점을 보여준다. 특히 "제7의 봉인에 부쳐"라는 부제는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 제7의 봉인을 떠올리게 하며, 인간이 죽음이라는 절대적 진실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창조하고자 하는지를 탐구한다.

한강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시적 언어로 심도 있게 표현하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그의 미학은 단순히 생과 사를 대립적으로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음과의 대화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는 데 있다. 특히 "나직이, 더없이, 더없이 부드럽게"라는 반복적 표현은 시인의 언어가 얼마나 섬세하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지를 보여준다.

요컨대, 저녁의 대화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직시하되, 이를 통해 오히려 삶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시이다. 죽음 앞에서 겸허하면서도 고귀한 인간 의지를 담아낸 한강의 시 세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미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단순히 시적 언어를 넘어 한강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음을 증명한다.



ㅡ  청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