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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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의 연회
배추를 심었다
흙 속에 부드러운 초록의 꿈을 묻었다
햇살은 축복을, 비는 노래를 더했건만
그 자리엔 이미 잔치가 벌어졌으니
벌레들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큰 입 작은 몸, 서로 다른 형체의 생명들,
초록 속살에 모여들어 연합한 축제.
어느 입도 허투루 가지 않았으니,
풍성함에 젖은 자들의 나른한 낮잠,
그 평화는 그들만의 것이었다.
배추는 이제 얇은 망사 위의 초상화,
잎사귀마다 남은 흔적은 문장들.
다툼 없는 잔잔한 생태의 리듬 속에,
텃밭은 하나의 우주가 되었다.
자연은 늘 그렇게 답을 준다.
아들아, 김장을 기다리던 네 목소리,
나는 그 소망을 흙에 묻었건만,
배추는 어느새 벌레들의 추억 속으로.
농부의 손길은 희망을 먹인 그릇,
허허 웃음만 남긴 채 비워졌다.
잃은 것은 배추뿐이었을까,
흙과 생명 사이를 오간 작은 깨달음,
바람과 벌레가 주인이 된 텃밭에서
순환의 춤이 계속됨을 보며
우리는 배움을 이어간다.
심고 가꾸는 자는 항상 손님,
자연은 침묵 속에서 이 법칙을 속삭인다.
배추를 심으며 알게 된 이 진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서로의 흔적을 남기는 일,
흙 위의 모든 존재가 공존의 이야기이다.
실패란 이름 아래 피어난 이야기,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았던 계절.
벌레들의 만찬이 끝난 자리에서,
흙은 새로운 씨앗을 기다리며 숨 쉰다.
배추는 사라졌으나, 계절은 또 온다.
다음 해에는,
초록을 다시 심으며 더 단단한 꿈을 바라리라.
아들아, 벌레들과 나눌 여백을 두고
다시 시작할 것이다.
텃밭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