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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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이끄는 세상
공원의 한 풍경이다.
주인이 줄을 잡고 개를 이끌고 있다. 개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다. 이따금 풀밭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다가, 주인의 신호에 따라 다시 걸음을 내디딘다. 주인의 손에 들린 줄이야말로 그 관계의 중심축처럼 보였다.
누가 봐도 개는 따라가는 자, 주인은 이끄는 자였다.
묘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산책의 방향을 정하던 주인이 어느새 개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개는 가고 싶은 대로 나아갔고, 주인은 이를 막지 않고 묵묵히 뒤따랐다. 개의 발걸음이 멈추면 주인도 멈췄고, 개가 흥미를 보이는 곳이면 주인도 고개를 돌렸다. 줄의 위치는 변함없었으나, 주체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이끌림과 따름의 관계가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그 광경이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일상의 한 장면으로 보였으나, 곱씹을수록 그것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젊은 시절, 우리는 인생의 주체로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이끌어 나간다고 믿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 곧 인생의 방향이었고, 우리의 힘과 의지가 삶을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삶은 우리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따르는 것이 되어 버린다.
삶은 개와 같다.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구와 본능에 충실하다. 그 본능의 향방에 따라 우리는 끌려다닌다. 처음엔 우리가 줄을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도적으로 삶을 개척하며 산다고 믿는다.
문득 돌아보면, 삶은 이미 우리가 아닌 어떤 다른 힘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 그 힘은 나이일 수도, 건강일 수도, 혹은 시간이라는 거대한 무게일 수도 있다.
우리가 처음 개를 이끌며 산책을 나설 때는 모든 것이 선명하다. 공원의 길, 나무의 위치, 우리가 갈 방향이 뚜렷하다.
개를 따라가다 보면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다.
개가 서성이는 그 자리가 우리가 멈추는 지점이고, 개가 가리키는 곳이 우리의 목적지가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젊은 날의 목표와 계획은 나이가 들어가며 흐려지고, 결국엔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것에 따라 흘러가게 된다.
내가 본 그 주인은 나이 들어 보였다. 그의 발걸음은 느렸고, 손에 잡힌 줄은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개를 통제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통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개가 가고 싶은 대로 두는 것이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주인의 모습에서 나는 인생의 무상을 보았다. 삶이란 이처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고, 결국 우리는 그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한때는 모든 것을 움켜쥐려 했던 손이 이제는 느슨하게 줄을 쥐고, 삶의 방향을 맡겨두고 있다. 이 모습을 보며 문득 든 생각은, 우리가 아무리 인생의 주체가 되고자 해도, 결국은 자연의 흐름 속에 놓인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간이라는 줄에 묶인다.
어린 시절에는 그 줄을 잡고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지만, 나이가 들수록 줄의 힘에 끌려가게 된다. 줄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고,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
결국 개가 멈추는 곳, 삶이 멈추는 곳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쉬게 된다.
개를 따라가던 주인의 뒷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줄은 그들의 관계를 연결하는 동시에, 인생의 무게와도 같아 보였다. 사람은 그 줄을 통해 인생과 연결되어 있다.
어느 순간, 그 줄의 주체는 달라진다. 인생의 초반에는 우리가 줄을 잡고 이끌고, 후반에는 우리가 줄에 이끌린다. 그렇게 결국 우리는 인생이라는 산책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멈춘다.
개가 이끄는 세상.
처음엔 단순한 풍경처럼 보였던 그 장면이, 이제는 인생의 은유로 다가온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주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정말로 삶을 이끌 수 있는 존재일까, 아니면 단지 흐름 속에서 잠시 줄을 잡고 있는 존재일 뿐일까?
결국,
삶은 개와 같고,
우리는
줄 끝의 사람일 뿐이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