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창호지에 담긴 겨울의 풍경
김왕식
무서리가 내려앉은 아침, 밭 한가득 흰 옷을 입은 배추와 무는 추위를 견디며 김장 준비를 기다리고 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시골 마을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한편, 마을 끝자락 서너 칸 남짓한 초가집 아래에서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창호지를 손보며 겨울맞이 준비에 분주하다.
지팡이에 의지한 할머니는 오래된 문창살에 붙어 있던 낡은 창호지를 조심스레 떼어낸다. 옆에 놓인 바구니에서는 가을 내내 곱게 말려둔 단풍잎과 들국화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단풍잎은 여전히 빛을 품고 있고, 들국화는 은은한 향기를 간직한 채 고요히 누워 있다. 할머니는 새 창호지 사이에 이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씩 정성스레 끼워 넣는다. 마치 오래된 추억을 새 종이에 담는 것처럼, 한 장 한 장이 소중해 보인다.
창호지를 붙인 뒤, 할머니는 입안에 물을 머금고 푸우푸우 불어댄다. 물방울이 문살을 적시며 창호지 위를 스며드는 모습이 어쩐지 배 불뚝 복어를 닮았다. 근처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까르르 댄다.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할머니는 껄껄 웃으며 손주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햇살이 좋은 날, 말린 문풍지가 창문 위에 곱게 매달린다. 바람결에 살랑이는 문풍지는 마치 갓 단장을 끝낸 새 신부의 얼굴처럼 곱고도 깨끗하다. 창호지에 새겨진 단풍잎과 들국화는 작은 갤러리처럼 창살 사이로 빛나며 방 안을 환하게 한다.
아이들에게 창호지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할머니가 정성껏 붙여놓은 창호지에 손가락을 대고 침을 발라 구멍을 뚫는 철없는 장난이 시작된다. 구멍 사이로 빛이 들어오자 아이들은 신기한 듯 까르르 웃는다. 손가락을 쑤욱 집어넣는 모습은 마치 동네 아줌씨들 남몰래 신랑 신부의 첫날밤을 엿보던 그 장면이다.
이렇듯 소소한 풍경 속에서도 따스함이 가득하다. 낡고 소박한 초가집과 그 안에 담긴 창호지 한 장이 주는 정겨움은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온기와 같다. 할머니의 손끝에서 탄생한 창호지는 단순한 창문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정성과 사랑이 담긴 작은 세계다.
창호지에 난 작은 구멍으로 빛 한 줄기가 새어 나올 때마다, 아이들은 그것을 신기한 놀이로 기억한다.
이 풍경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이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빛 한 줄기처럼, 정겨웠던 겨울날의 기억은 언제까지나 따스하게 가슴 한편을 밝혀 줄 것이다.
창호지에 담긴 이 겨울 풍경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외려 그 소박함 속에서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움이 있다. 지금도 그 초가집에서는 할머니의 손길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멀리 퍼지고 있을 것만 같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