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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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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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젖어
밤하늘에 달무리가 피어오른다.
달을 둥글게 감싼 희미한 빛의 띠, 그 안에서 문득 박용래 시인의 월훈月暈이 떠오른다. 그가 노래한 달빛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고요한 밤을 감싸는 그 빛 속에는 세월의 흔적과 인간의 고독이 서려 있었다.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달빛에 이끌려 문을 열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길목,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달빛은 묘하게 따스했다. 마당으로 나서자 어둠 속에 부드럽게 스며든 빛이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귀를 기울여 본다. 박용래 시인의 월훈 속에서도 개 짖는 소리가 있었다.
"이윽고 멀리서 짖는 개소리, 달빛 속으로 멀어지다."
그의 시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개 짖는 소리도 이윽고 달빛 속에 묻혀버린다. 밤의 적막이 다시 깊어진다. 그는 달빛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어떤 감정을 품었기에, 그의 달빛은 늘 쓸쓸하면서도 따뜻했을까.
달빛은 어둠을 밀어내지만,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않는다. 은은하게 퍼지면서 어둠을 감싸 안을 뿐이다. 그 빛 속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어쩌면 박용래도 이런 밤, 이렇게 달빛 아래에서 오래도록 머물렀을 것이다. 달무리가 번지듯 그의 마음속에도 무언가 흐려지고, 스며들었으리라.
그의 시 속에서 달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다. 그것은 희미하고 불완전한 잔상이며, 인간의 삶과 닮아 있다. 완벽하게 밝지도,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돌아본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밤이 되고 달빛 아래 서면 더욱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골집 마당에도 이런 달빛이 내려앉곤 했다. 할머니는 밤이면 마당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한숨 속에 담긴 세월과 그리움을. 그러나 이제는 안다. 달빛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음을.
박용래가 바라본 달도 그러했으리라. 그는 달빛 아래에서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고,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시가 되어 남았다.
밤이 깊어간다.
한참을 서 있다가 조용히 방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달빛은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 창을 닫아도, 불을 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시간이 남긴 흔적이자, 기억의 잔상이었으며, 언젠가 다시 만날 그리움이었다.
오늘 밤, 달무리 속에서 나는 박용래의 달빛을 보았다. 그의 시 속에서 걸어 나와, 그와 같은 마음으로, 같은 밤을 바라보았다.
ㅡ 청람
https://youtube.com/shorts/lMxh4g3TAAA?si=ie2RKKbfew1XA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