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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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숲과 길
시인 청민 박철언
책 속엔 숲이 있다
일렁이는 초록 소리 가득 품고도
바람 방향에 귀 기울이는 나무들의 지혜로
고요한 가르침을 주는 숲
힘들고 지친 영혼을 위해
피톤치드나 그늘, 바람도 키워내고
계곡이나 옹달샘도 숨겨둬
서서히 치유가 일어나는 곳
숲의 정령 불러 축제 맘껏 즐겨도
신령스러운 기운 오롯이 담아
훗날 소리 없이 제각각
책으로도 떠나보낼 줄 아는 숲
책 속엔 길이 있다
평탄한 길, 서러운 길, 위험한 길,
기쁜 축복의 길, 끝없는 미로까지
가다 보면 저절로 깨우쳐지는 길
과거로 가는 역사 깊이 들여다보면
미래로 가는 길까지 내다보인다
수많은 나침반을 품은 책 속엔
■ 책이 품은 숲, 길이 내민 등불
― 박철언 시인의 「책 속의 숲과 길」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민 박철언 시인은 평생을 원칙과 책임의 길 위에 서 있었다. 법조인의 냉철함과 공직자의 청렴함은 그를 단단하게 다져온 껍질이지만, 그 속에는 오랜 세월 문학의 향기를 품고 자라난 순결한 시심이 살아 숨 쉰다. 그의 시 「책 속의 숲과 길」은 바로 그 내면의 풍경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 고백이며, 또한 지혜로운 삶의 내력서다.
시의 첫 연에서 “책 속엔 숲이 있다”는 선언은 단순한 비유를 넘는다. 그것은 지식을 쌓는 공간을 넘어서, 생명의 숨결이 깃든 치유의 공간으로서의 책을 바라보는 시인의 인식이다. “일렁이는 초록 소리”는 생명의 감각이며, “바람 방향에 귀 기울이는 나무들의 지혜”는 곧 독서를 통해 세상의 흐름과 질서를 배우고자 하는 겸허한 태도다.
시인이 말하는 숲은 침묵 속에서 성장하며, 묻지 않고 가르친다. 그것은 군림하지 않는 진리의 형상이다.
이어지는 연에서 “피톤치드나 그늘, 바람도 키워내고 / 계곡이나 옹달샘도 숨겨둬”라는 구절은 책이 주는 은은한 위로의 공간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말 없는 치료, 그 자체가 숲이며 곧 책이다.
이 숲은 억지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내면에서 조용히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자생의 미학’을 품는다. 이는 박 시인이 오랜 세월 문학과 삶을 병행하며 깨달은 ‘내면 치유의 원리’이자, 인간을 향한 언어의 가장 깊은 본질이다.
셋째 연의 “숲의 정령 불러 축제 맘껏 즐겨도”라는 대목에서는 예기치 못한 해방감이 읽힌다. 단정하고 엄격한 삶을 살아온 이의 시에서 느껴지는 이 자유는 오히려 절제에서 비롯된 기쁨이다. “훗날 소리 없이 제각각 / 책으로도 떠나보낼 줄 아는 숲”이라는 표현은 지식과 감성의 축제 후, 조용히 제 자리로 돌아가기를 아는 겸허한 존재의식을 보여준다.
이는 책을 단지 정보의 축적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며, 마치 조용히 길을 내어주는 노송처럼 무게 있는 아름다움이다.
후반부에서 시인은 “책 속엔 길이 있다”라고 전환한다. 이 길은 단지 물리적 이동의 경로가 아니라, 정신과 인생의 여정이다. “평탄한 길, 서러운 길, 위험한 길”은 단지 감정의 분류가 아니라, 한 인간이 책을 통해 경험하는 다층적 인생의 지도다. 길은 안내하지 않는다. 그러나 걷다 보면 ‘저절로 깨우쳐진다’는 말에서, 시인은 독서가 강요가 아닌 자연스러운 각성의 과정임을 강조한다.
마지막 연은 박철언 시인의 인생 전체가 녹아든 구절이다. “과거로 가는 역사 깊이 들여다보면 / 미래로 가는 길까지 내다보인다”는 구절은, 과거에 충실했던 자만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철학적 신념의 발로다. 그는 독서라는 숲길을 걸으며, 자신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나라의 미래까지 끊임없이 성찰해 온 사람이다.
청민 시인의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말의 위세보다 말 없는 의미를 드러내는 품격이다. 이 시는 문학의 거창한 장식이 아니라, 조용한 앎의 숲을 조성해 가는 ‘정직한 시인의 마음’이다.
청민 시『책 속의 숲과 길』은 단순한 독서 예찬이 아니다. 그것은 곧 ‘책으로 살아온 인생’에 대한 정중한 고백이며, ‘말보다 깊은 길’로 우리를 초대하는 겸허한 시인의 손짓이다.
이 시를 읽고 나면, 독서는 더 이상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라, 숲의 정령들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깨닫게 된다.
청민 시인은, 평생 그렇게 걸어온 사람이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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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 박철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