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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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결에서 인간을 노닐다
청람 김왕식
꿈을 꾼다. 그러나 문득 깨닫는다. 그것이 꿈이었는지조차 희미한 날들이 있다. 마치 바람이 스쳐간 흔적을 붙잡을 수 없듯, 내 마음속을 지나간 것들이 모두 허상이라면, 과연 ‘경험’이라 부를 수 있을까. ‘꿈을 꿨다’ 말하나, 실상은 꾼 적이 없는 것처럼 공허하다. 눈물을 흘렸다 말하나, 어느샌가 뺨은 마르고 마음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기뻐 날뛰는 순간조차 지나고 나면, 마치 그것이 ‘환희’였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러고 보면, 깨달았다고 여긴 것조차 찰나의 안개처럼 흩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은 무엇인가. 흘러간 장면들, 지나간 감정들, 쌓이고 무너진 생각들, 결국은 꿈이라는 하나의 바탕 위에서 흘러간 그림자들이다. 희로애락도, 생로병사도, 모두 실재보다 실감의 조각들이었다. 삶이라는 한 편의 긴 무대 위에서 펼쳐진 연극이었고, 그 연극의 막이 내리는 순간, 관객이었던 나는 또 다른 차원의 무대 위로 이동할 뿐이다.
이제야 깨닫는다. 인간이라는 존재조차, 실은 꿈의 한 장면이었다는 것을. "나"라고 부르던 자아조차 한낱 물거품이었다는 것을. 그러니 어찌 두려움으로 오늘을 가둘 것이며, 어찌 집착으로 내일을 묶어둘 수 있으랴. 비로소 이 허망함이 자유를 부른다. 꿈이기에 괴로움도, 기쁨도,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다. 이 허깨비 같은 하루를 그저 한 폭의 유희로, 한 장의 풍경화로 바라보게 되는 경지.
그리하여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조차, 하나의 몽환적 체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꿈속에서는 계단을 오르고도 땅에 닿지 않고, 누군가를 껴안고도 온기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모호함 속에서도 우리는 슬퍼하고 웃고, 사랑하고 헤어진다. 그 모든 감정이 거짓일지라도, 그 순간에 우리는 진짜처럼 살았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꿈과 실재의 경계를 허무는 참된 예술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오늘을 마음껏 웃어야겠다. 마음껏 울고, 사랑하고, 떠나야겠다. 유심으로 살아온 날들을 무심으로 바라보며, 그 무심조차 언젠가 꿈으로 사라질 것을 알기에,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결국 인간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조차 이 무대가 끝나면 벗게 될 탈일 뿐.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나는 배우로서, 관객으로서, 창작자로서 이 꿈을 완성하며 살아야겠다.
잠시 후 무대의 조명이 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나는 웃을 것이다. “아, 참 좋은 꿈이었구나.” 그렇게, 인간으로서 깨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이 꿈을 즐기리라.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