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사라지지 않는 것들의 온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흔적

― 사라지지 않는 것들의 온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라진다고 해서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다. 외려 눈에 보이지 않을수록 더 짙은 흔적을 남기곤 한다. 누군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찻잔의 열기, 오래된 손때가 밴 책갈피 하나, 낙엽이 지나간 길 위의 잔흔. 모든 흔적은, 머물렀던 것들의 증거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흔적을 남긴다. 손으로 벽에 기대는 무심한 자세에도, 창밖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흔적은 묻어난다. 그것은 의도적인 표식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다. 존재는 흔적을 통해 자신을 이야기한다.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흔적은 가끔 아프다.

잊은 줄 알았던 사랑의 메시지,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의 필체, 함께 웃던 그 장소에 홀로 남겨진 지금의 나. 그러나 그 아픔은 동시에 따뜻함을 담고 있다. 흔적이란, 기억과 감정이 응축된 결정체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안온함을 느낀다. 그것이 흔적의 이중성이다.

사람의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은 발자취다. 떠난 뒤에도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남긴 것들이 그를 말해준다. 입었던 옷의 향기, 고쳐 쓴 문장 하나, 손때 묻은 물건들. 그래서 진짜 이야기는 사라진 후에 시작된다. 흔적은 부재를 통해 존재를 말하는 언어다.

우리는 누군가의 흔적 위에서 살고 있다. 부모의 희생 위에 선 지금의 발판, 친구의 위로가 머물렀던 마음의 자락, 이름 모를 누군가가 심어놓은 나무 그늘 아래의 쉼. 흔적은 이어진다. 사라지지 않고 전해진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도, 누군가의 다음 흔적이 될 것이다.

흔적을 존중하는 것은 기억을 존중하는 일이다. 그것이 사라진 사람을 잊지 않는 방식이며, 남은 사람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늘도 흔적을 남기자. 따뜻한 말 한마디, 조심스러운 손길, 누군가의 마음속에 오래 남을 미소 하나. 흔적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가장 인간적인 선물이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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