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 ㅡ청람 김왕식

김왕식




□ 정호승 시인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시인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정호승 시인



본관은 동래(東萊).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중학교 1학년(62년) 때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도시 변두리에서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고, 경희대가 주최한 전국고교문예 현상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당선되어 문예장학금을 지급하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68년 입학)를 들어가게 되었으며, 같은 대학의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으며,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소설가로도 등단하였다.






첫눈의 약속, 존재의 따뜻함을 부르는 시학
― 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정호승 시인의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사랑과 기다림, 기억과 약속이 한 겹 눈처럼 포개진 아름다운 시편이다. 시인은 삶의 가장 순결한 감정을 '첫눈'이라는 메타포로 포착하고, 그것을 사람 사이의 온기로 연결한다. 이 시는 단지 계절을 읊은 풍경시가 아니라, 존재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윤리적이고도 철학적인 노래다.

첫 연에서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이라는 이미지는, 삶의 근원인 모성과 전통적 공동체의 정서를 상기시킨다. 아직 아무 발자국도 없는 순백의 눈길은 인간관계의 원초적 신뢰를 상징하며,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은 단순한 만남을 넘어 삶의 본질적인 기약, 즉 사람을 향한 귀의(歸依)를 선언하는 문장이 된다. 이 첫눈은 사랑과 순결, 그리고 새로움의 총체로 작용하며, 시인의 내면 윤리가 자연의 시간에 얹혀 절묘한 시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중간 연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교차된다.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의 장면은 연인의 유쾌한 현실감각을 드러내며,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는 도시 변두리의 소박한 풍경과 함께 삶의 진짜 온기가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시인은 작은 구체들을 통해, 사랑이란 먼 곳에 있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는 시구는 단순한 감정의 묘사를 넘어, 눈물과 웃음이 공존하는 인생의 진실한 찰나를 압축하는 시적 정점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의 철학적 울림은 깊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는 선언은 시인이 일관되게 보여주고자 하는 '기다림의 윤리'를 뚜렷이 부각한다. 첫눈을 기다리는 이들은 곧 사랑을 품고 있는 이들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다시 순백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시인은 눈 내리는 자연의 섭리를 단순히 기상현상으로 보지 않고, 약속과 믿음, 그리고 사람의 온기 때문에 내리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바라본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라는 시구는 정호승 시인의 존재론적 감수성과 삶의 겸허를 집약한 문장이다. 그는 일상의 사소한 장면에서 가장 위대한 의미를 발견하는 시인이다. 이처럼 그의 시는 늘 인간의 내면과 사회적 현실 사이를 잇는 다리처럼 존재하며, 온유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시적 가치관을 견지해 왔다.

마지막 연의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는 시를 하나의 영화적 장면처럼 완결 짓는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 속에 시인은 삶의 소중함, 기다림의 아름다움,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끝까지 지켜내는 데서 오는 깊은 울림을 품는다. 기차역은 이별과 만남이 교차하는 상징적 장소이며, 커피는 일상 속 따뜻한 삶의 메타포다.

정호승 시인의 삶의 가치철학은 결국 사람을 믿고, 기다림을 사랑하며, 눈 내리는 세상을 '축복'으로 여기는 낙관에 있다. 그의 시는 말의 과잉을 경계하고, 조용한 언어로 마음을 건드린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단순한 문장 속에 담긴 진실한 울림은, 지금도 누군가의 삶을 포근히 덮고 있을 것이다. 이 시는 계절의 시가 아니라, 사랑의 시이고, 인간 존재를 위한 시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정호승 시인의 시학이며, 그가 세상과 맺고 있는 시적 연대의 방식이다.


ㅡ 청람 김왕식






정호승 시인의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스승과 제자 달삼이의 대화




낮은 기온이 골목을 스미듯 내려왔다. 해가 넘어가자마자 바람이 먼저 겨울을 알렸다. 스승은 낡은 창틀 너머로 하늘을 오래 바라보았다. 구름은 낮게 깔렸고, 빛은 차분히 사라지고 있었다.

달삼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첫눈은 왜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스승은 미소를 머금고 찻잔을 덜컥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건 첫눈이 아직 더럽혀지지 않아서지. 모든 첫 시작이 그렇듯, 첫눈은 세상 위에 내리는 순결한 허락이야. 사람도, 시간도, 사랑도 첫 순간은 가장 빛나지.”

“그래서 시인들은 첫눈에 대해 시를 쓰는 걸까요?”

“그래, 많은 시인이 눈을 노래하지만, 정호승의 시는 유독 인간의 온기와 삶의 겸허를 품고 있어. 시 한 편 들려주지. 제목이 ‘첫눈 오는 날 만나자’야.”

스승은 천천히 시를 읊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시어마다 살결처럼 따스한 떨림이 묻어났다. 달삼이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듣고 있었다. 시가 끝나자, 창밖엔 벌써 작은 눈송이 하나가 유리창에 부딪혔다.

달삼이가 조용히 말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말은, 단지 날씨에 대한 약속이 아니군요.”

“맞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고백이고, 기다림의 윤리지.”

스승은 손을 등 뒤에 얹고 천천히 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시 속 첫 연을 보게.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가는 장면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야. 그건 인간의 순결한 기억이야. 싸리비는 땅을 쓸어내면서 삶의 자리를 마련해 주지. 그 위를 걷는다는 건, 누군가 마련한 길을 따라 나아간다는 뜻이고, 그 길에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건 마음을 온전히 내주는 일이지.”

달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왜 꼭 첫눈이어야 하죠? 두 번째 눈도, 눈이 쌓인 날도 가능하지 않나요?”

스승은 빙긋이 웃었다.

“그럼에도 첫눈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 약속이 한 번도 밟히지 않은 마음 위에 찍히는 첫 발자국이기 때문이야. 사랑은 가장 깨끗한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겠니?”

그 말에 달삼이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언가 오래 묵혀뒀던 감정이 언 마음속에서 천천히 풀리는 것 같았다. 스승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둘째 연에서 나오는 ‘군밤을 사 먹으며 눈물이 나도록 웃는’ 장면은 현실적이지. 시인은 가난한 사람도, 연탄 화덕도 그냥 지나치지 않아. 사랑이란 건 현실 위에서 빚어지는 감정이야. 이념도, 로망도 아닌, 따뜻한 손과 발로 걷는 삶 그 자체에서 피어나는 거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벽시계의 초침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 밖은 어느새 작은 눈발이 퍼지고 있었다. 스승은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눈을 보렴.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는 구절, 이 얼마나 정확한 언어인가. 첫눈을 기다린다는 건, 아직도 마음 깊숙이 누군가를 믿는다는 증거야. 그런 사람들 덕분에 세상엔 아직도 희망이 있어.”

달삼이는 그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나간 어느 겨울, 자기도 누군가와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승은 그 눈빛을 읽었는지 조용히 물었다.

“첫눈 오는 날,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느냐?”

달삼이는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기다렸습니다. 그 사람은 오지 않았지만… 그 기다림 덕분에 눈 내리는 거리의 고요함을 처음으로 느꼈어요.”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히 말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사랑은 반드시 만나는 일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야. 기다리는 마음만으로도 사람은 한 뼘 자란다. 시인은 말했지,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고. 첫눈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만든 시의 시간이지.”

스승은 찻주전자에 다시 따뜻한 물을 부었다. 증기가 피어오르고 방 안이 더욱 따스해졌다.

“달삼아, 시는 삶을 가볍게 해주는 언어가 아니란다. 정호승 시인의 시는 언제나 한 편의 기도와 같다. 침묵을 건너는 언어, 마음의 길을 만드는 약속 같은 것이지.”

달삼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스승님, 이번 겨울에 첫눈이 오면… 저도 누군가에게 약속을 해보고 싶어요.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을 같이 걸을 수 있는 그런 약속이요.”

스승은 조용히 웃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래, 그날은 달삼이도 누군가의 첫눈이 되어주는 날이겠구나.”

바람에 실린 눈발이 창문에 부딪히며 흩어졌다. 방 안의 침묵은 더 깊어졌고, 스승과 제자의 대화는 시처럼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누군가, 어느 첫눈 오는 날, 이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 그 기다림만으로도 눈은 내릴 수 있다는 것을.



ㅡ 청람 김왕식




정호승 시인의 이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



청람 김왕식




정호승 시인의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겨울의 낭만만을 담은 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시인의 체온만큼이나 따뜻한 경험과, 결코 알려지지 않은 작은 인연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정호승 시인은 평소에도 ‘기다림’이라는 주제를 참 좋아했다. 그에게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사람을 향한 신뢰이자 마음의 예술이었다. 이 시는 그런 그의 철학이 하나의 계절 안에서 눈처럼 내려앉은 시편이지만, 그 배경은 다소 엉뚱하고도 정호승다운 해프닝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겨울 초입, 시인은 종로 근처 작은 다방에서 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은 이미 훌쩍 넘겼고, 유리창 너머로는 첫눈이 조용히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짜증이 아니라 오히려 묘한 고요 속에 자신이 잠긴 것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다방엔 늦은 라디오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군밤장수가 다방 밖에 연탄 화덕을 밀어놓고 군밤을 굽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마음을 쿡 찔렀다.

그때였다. 다방 안으로 중절모를 쓴 한 노인이 들어와, 시인 맞은편 자리에 느긋이 앉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시인은 그 침묵이 신기하여 무슨 일인가 쳐다보았다. 노인은 적던 손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같은 날, 첫눈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소. 근데 생각해 보니 아무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글을 써보는 중이오.”

그 말을 들은 순간, 시인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번쩍 떠올랐다. ‘그래,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 그런 약속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

그날, 지인은 결국 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인은 되려 그 자리에 혼자 앉아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첫눈 오는 날 만나자”라는 글귀를 써넣었다. 시의 첫 문장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밤새 그 문장을 붙잡고 시를 썼다.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 “군밤을 사 먹으며 눈물이 나도록 웃는 사랑”, “커피를 마시고 기차역을 서성거리는 사람들”… 모두 그날의 경험과 마음에서 솟구친 이미지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가 있다.

이 시가 발표되자, 모 대학의 한 학생이 시인에게 손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정말로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군에 간 남자친구였죠. 그는 그날 나오지 못했고, 그해 겨울이 지나 그 사람은 다른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고, 저는 그 사람이 저를 잊은 게 아니라, 끝까지 기다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저 오지 못한 것이지, 마음은 먼저 와 있었겠구나 하고요. 감사합니다.”

그 편지는 정호승 시인의 책상 서랍에 지금도 고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시인이 그 편지를 읽고 조용히 말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첫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서 내리는 겁니다.”

이처럼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한 다방의 오후, 낯선 노인의 침묵, 오지 않은 친구, 그리고 세상 어딘가에서 마음을 꺼내 적은 사람들 덕분에 태어난 시다. 첫눈처럼 다가와, 첫눈처럼 맑게 남은 시. 그것이 정호승 시인의 겨울 시학이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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