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의 미 ㅡ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노각






노각의 미





노각은 세월이 남긴 균열의 예술이다. 아직 풋풋한 오이가 제 몸의 빛깔과 탄력을 자랑할 때, 노각은 이미 햇살과 바람, 흙과 물의 흔적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표면에는 주름이 갈라지고 균열이 번져 있지만, 그것은 쇠락의 자국이 아니라 생애의 문양이다.
마치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한 겹 한 겹이 계절의 숨결을 기록하고, 무질서한 듯 흩어진 갈라짐 속에는 자연만이 그려낼 수 있는 질서가 숨어 있다. 노각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무질서의 질서에 있다.

우리는 흔히 매끈한 것을 아름답다 말하고, 흠 없는 표면을 귀하게 여긴다. 노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르다. 삶은 결코 매끈하지 않다. 살아낸 날들은 균열로 새겨지고, 감정의 굴곡은 피부와 살 속에 흔적을 남긴다. 노각의 갈라진 껍질은 인간의 주름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주름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이다. 모든 균열은 시간을 견딘 흔적이며, 그 속에서만 참맛이 우러난다. 젊음의 오이가 싱그러움을 준다면, 노각은 깊이를 준다. 얕은 단맛이 아니라 무게 있는 쓴맛과 시원함이 공존하는, 인생의 맛이다.

노각의 색은 더욱 특별하다.
연둣빛이 서서히 옅어지고, 노란빛과 흙빛이 뒤섞이면서 그 어떤 조각가도 흉내 낼 수 없는 색채를 드러낸다. 마치 가을 들녘의 들꽃처럼 수수하지만, 햇살에 닿을 때마다 은은히 빛나는 아름다움을 품는다. 겉껍질은 거칠고 상처투성이 같으나, 그 내부에는 여전히 투명한 수분과 시원한 속살이 숨겨져 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양만을 보고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에 대한 반어적 풍자이자, 내면의 힘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향기임을 알려준다.

노각은 존재 그 자체로 은유의 보고다. 갈라진 껍질은 삶의 불협화음이자 동시에 삶을 풍요롭게 하는 화음이다. 균열은 무너짐이 아니라 새로운 통로이고, 주름은 쇠락이 아니라 성숙의 문이다. 노각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인간 존재를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며 흠집을 입고, 표면이 일그러지며, 젊음의 광택을 잃는다. 그 안에서만 깊은 맛과 향, 생명의 본질이 드러난다.

노각은 속삭인다. “아름다움은 매끈한 곳에만 있지 않다. 흠과 균열 속에야말로 진정한 색이 있다.” 이것이 노각 예찬의 핵심이다. 삶의 무질서를 품어내며 질서로 빚어내는 자연의 손길, 그 손길 속에서 빛나는 균열의 미학이 바로 노각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세월의 무게가 남긴 주름과 흔적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인생의 참된 풍미를 음미하게 된다. 노각은 늙음의 상징이 아니라, 늙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무르익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ㅡ 청람 김왕식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네 ― 분산된 발의 질서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