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트라우마, 까짓것!




트라우마는 밤마다 몰래 들어와 마음을 점령하는 그림자다. 밀어내려 하면 더 깊숙이 스며들고, 지우려 하면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고통의 기억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싸워 이기는 힘이 아니라,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지혜다.

가장 먼저 지금 이 순간을 붙잡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의 상념이 몰려올 때, 눈앞의 작은 사물 하나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 손에 쥔 잔의 온기, 창문 너머로 스치는 바람, 들고 나는 호흡의 리듬. 이 단순한 감각들이 현재로 돌아오는 길을 열어 준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릴 듯할 때 작은 돌 하나가 물결의 방향을 바꾸듯, 의식을 현재에 두는 순간 과거의 소용돌이는 힘을 잃는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해답이다. 고통은 몸에 매듭처럼 얽혀 있으므로 걸음과 땀, 바람과 호흡이 그 매듭을 천천히 풀어낸다. 숲길을 걷다 보면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다 이내 제 가지로 돌아가듯, 마음도 결국 제 길을 찾아 돌아온다.

고통은 침묵 속에 가둘 때 더욱 짙어진다. 그러나 말해지는 순간 빛을 만나고, 목소리를 얻는 순간 더 이상 절대적인 공포로 남지 못한다.

작은 습관은 흔들리는 정신의 닻이 된다. 일정한 시간에 눈을 뜨고, 차 한 잔을 우려내며, 짧은 글을 적거나 기도를 드리는 것. 사소한 반복이 삶을 고정시키고, 거대한 결심보다 오래 버티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책망하지 않아야 한다. 트라우마는 약함의 흔적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견뎌낸 결과 남은 상흔이다.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살아냈다는 증거다. 흔들리고 무너질 듯하면서도 다시 일어선 시간들이야말로 용기의 다른 이름이다.

평온은 단숨에 오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숨을 고르고,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나누고, 작은 습관을 쌓으며, 자신을 다독이는 그 과정 속에서 서서히 다가온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지만, 시간이 켜켜이 덮이면 흉터는 문양이 되고, 문양은 결국 또 하나의 삶의 문학이 된다.

결국 극복의 가장 좋은 방법은 자존의식의 회복이다. 스스로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떠올려 그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한심한 존재로 두지 말고, 오히려 그 손을 붙잡아 힘차게 끌어내야 한다. 내 안의 작은 가능성을 믿고, 그 믿음에 기대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트라우마는 더 이상 나를 묶어 두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아픔은 무너뜨리는 벽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문이 된다. 평온은 결국 자기 안의 존엄을 되찾는 데서 시작된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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