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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찬 Sep 12. 2024

1-6. 이야기

머릿속, 공간



작가 발터 슈미트는 공간의 심리학에서 흥미로운 연구를 소개해줍니다. 방 안에 있는 실험 참가자들이 무언가를 외운 후 한 집단은 방 안에 남아서, 다른 한 집단은 문을 열고 방을 나가서 기억해 내는 과제를 한 겁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방에 머무른 참가자들이 더 많이 기억해 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실험을 두고 인상적인 표현을 남깁니다.


우리의 뇌 안에서는 사물 인식과 장소가 지속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돌아간다. 이는 마치 문을 통과하자마자 하나의 생각 서랍이 닫히면서 다음 공간에서 할 일을 모두 집어넣을 수 있는 새로운 서랍이 열리는 것과 같다.


저는 이런 상상도 해봅니다. 비록 몸이 이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 세상을 한눈에 담을 때도 새로운 생각 서랍이 열릴 거라고 말이죠. 전경을 감상할 때 전체를 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형상 하나하나를 보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찾는 존재이니까요. 제가 장소 대신 '세상'이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안에서 밖을 볼 때, 밖에서 안을 볼 때, 내 시선에 따라 무언가가 경계가 될 때, 시선이 머무는 각각의 공간에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경계가 나뉜 공간을 감상한다는 건, 각각의 공간에 담긴 생각 서랍들을 반쯤 열어두고 있는 것 아닐까요?


네 장면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왼쪽, 가운데, 오른쪽,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공간. 그런데, 왼쪽에 보이는 장소가 창문 너머에 있는 바깥이라고 생각했나요? 사진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왼쪽 형상이 실제 바깥 풍경이라고 인지하게 된 것은 왼쪽, 가운데, 오른쪽을 한 데 묶을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왼쪽 건물, 바닥, 오른쪽 담장 너머 건물까지 한 부분이 됩니다. 멀리 보이는 나무와 그 바깥 공원이 또 한 부분이 되고, 하늘이 나머지 한 부분이 됩니다. 재료와 색감이 경계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르내리고, 위에서 움직이고, 아래에서 움직이고, 한 자리에 머무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 공간의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느슨하게 분리된, 여러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장면인 거죠.


공간을 다룬 책에서 종종 나오는 얘기가 '치환'입니다. 보고 있는 장면에서 이미 알고 있는 형상을 찾게 된다는 거죠. 이처럼 이야기는 구체적인 형태를 통해서 표출되기도 합니다. 저 역시 하늘에서 고래도 찾고 말도 찾고 거북이도 찾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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