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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May 09. 2023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편지 같은 환하고 동그란 달 4

언덕을 내려와 수행자는 멈춰 섰다. 우리가 같이 걸을 수 있는 데는 거기까지. 바로 거기가 청산과 속세의 경계라고 할까. 무경계의 경계에서 잠시 서로 바라보다 말없이 웃었다. 수행자가 손에 들고 있는 하얀 봉투를 내게 건넸다.


편지였다. 어느 겨를에 편지를 다 썼는지? 그녀가 편지 쓰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내가 잠든 이후 몰래 썼을 것이다. 새벽에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고꾸라지던 그녀 모습이 떠올랐다. 일찍 잠들어도 예불 시간에 맞춰 일어나기란 쉽지 않은데 내게 편지를 쓰느라 잠이 더 부족했는지 모른다.  


나이 차이는 많지 않으나 암자 뒤의 산처럼 우뚝하게 보이는 수행자들에게 절로 존경심이 일었다. 그중에서 늘 환하게 웃는 얼굴이 아름다워 주근깨가 꽃잎 무늬처럼 보이던 수행자. 그녀에게 눈길이 많이 갔다. 내성적인 나와 반대 성향을 가진 그녀에게. 내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고 싶어 한 때였으니.


수행자는 나를 보는 것이 자기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말한 대로라면 그녀는 수행으로 변화된 게 분명했다. 수행을 하면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있구나. 그래서 법사가 내게 절에서 일 년 살라고 말했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게 그때인지 지나고 나서인지 가물가물한다. 세월이여.


자신을 해방하는 방법이 있으나 뿌리치고 내려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을, 시야에서 멀어져 사라질 때까지 보이지 않는 앞길을 염원하는 마음을 글을 쓰는 지금 헤아려본다. 나도 누군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본 적 있으니 그 마음을 모르지 않지.


걸어 들어간 먼 길을 되돌아 나올 때 수행자의 편지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아직 더운 기운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가을이 밀려오고 있었다. 더위에 뒤섞인 이른 갈바람을 마시자 땀이 나면서도 서늘했다. 그 길을 혼자 한참 걸으면서 어떻게 편지를 펼쳐보지도 않고 손에 들고만 있었는지. 점촌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서야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어 집으로 가는 몇 시간 내내 읽었다.


수행자의 편지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라는 시구절로 끝났다. 다시 돌아오라는 당부는 아니고 나의 봄이 어서 오기를 바라는 기원이었다. 버스 안에서 그녀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며 이성부 시인의 <봄>을 인용한 편지를 읽고 또 읽으니 떨어지는 눈물방울 아래 푸른색 글자가 번져 편지지는 점점 바다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내 어리석음의 껍데기가 꽝! 깨어질 수 있을까.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쪼개듯. 바닥까지 자신을 낮추는 절로 내 안의 빛이 광채를 발하는 때가 있을까. 내 머리는 번쩍하고 내 가슴이 환하게 되는 순간을 때로 상상하며 하산한 뒤 암자에서 하던 대로 기도를 이어갔다. 혼자서 하는 기도가 작심삼일처럼 뚝 끊겼다 이어지고는 했지만 그렇게라도 지속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맑아져서 새벽이슬 같을 때까지. 향기로워서 향기로워서 아침 연못의 연꽃 같을 때까지. 동짓달 밤하늘의 별보다 더 거룩하도록.”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읽다가 내가 그리워하는 내가 어떤 모습인지 알 것 같았다. 맑고 향기롭고 거룩한 내가 그리워 백팔배를 다시 시작하고 뜻을 제대로 모른 채『금강경』을 독송하고 있을 때.


토굴에서 홀로 정진하는 수행자를 발견하고 마음이 술렁였던 것이다. 정진하는 수행자들을 향한 관심은 창밖만이 아니라 사이버 세상 속으로, 책 속으로 뻗치고 있었다. 우왕좌왕 헤매다 어느 모퉁이에서『길 없는 길』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본 순간 나는 절로 이끌렸다. 부지불식간에 책을 주문하고 책이 도착한 날부터 만사를 제쳐두고 밤낮으로 길 없는 길을 눈길로 걸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는 산문도 썼듯이 최인호 소설가는 “스님이 되어 구도의 길을 걷고 싶다는 맹렬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훗날 소설가는 서재에 경허의 게송 하나를 걸고 “경허의 이 말이야말로 요즘 나의 구경(究竟)이다”라고 말했다. 세속에 앉아 눈앞의 청산을 바라보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빙빙 돌던 나도 그의 소설에서 만난 경허의 게송으로 정신이 들었다.


“‘세상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이 이르는 곳에는 꽃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世與靑山何者是 春光無處不開花).’ 이 구절은 오늘밤 저를 찾아오신 강 교수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경허 스님의 법문입니다. 굳이 뜻을 풀이하자면 이런 뜻이 되겠지요. 저 속세와 청산은 어느 곳이 옳은가 시비를 가릴 필요가 없다. 봄볕이 비치면 속세에도 청산에도 꽃은 어김없이 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강 교수님께서 굳이 모든 것 다 버리고, 삭발하여 세속을 다 버리고 청산으로 출가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도(道)에 들기 위해 일부러 청산을 찾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봄볕이 이르면 세속에서도 어김없이 꽃은 만발하니 청산이니 진세(塵世)니 어느 곳이 옳은가 시비를 가릴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꽃이 피는가 그 꽃피는 곳을 찾아가려 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봄볕을 발견해야지요.”

-최인호,『길 없는 길』2, 여백미디어


법명 스님이 강 교수에게 해주는 이 말이 출가할 뜻을 품은 내게 하는 말로 들렸다. 책을 대하고 앉은 나는 법명 스님과 마주 앉아 있는 듯했다. 경허 스님의 게송과 그것을 풀이해 준 법문에 감명을 받아 문장을 필사하고 나도 모르게 감상까지 몇 줄 적었다.


“꽃 찾아 나서려던 마음 그 마음이 꽃 필 자리인 것을. 진정 내가 되어 나만의 향기를 풍기는 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난초는 깊은 산골에 있든 선비의 서재에 있든 난초의 향기를 풍긴다.”


이렇게 써두고 방에서 한 스님의 독경 테이프를 들으면서 저녁 기도를 할 때였다. 형광등 두 개 중 하나의 불이 깜박일 때가 종종 있었는데 드디어 그 하나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의 등으로는 어두워 글자가 잘 안 보이기에『금강경』을 들고서 읽고 있었다. 그때 문득 꺼진 형광등에 불이 다시 들어왔다. 그렇게 환하고 밝을 수가 없었다. 형광등 하나가 켜졌을 때의 밝기와 두 개가 다 켜졌을 때의 밝기 차이. 그것은 깨달음의 정도에 따른 마음의 밝기 차이와 같지 않을까?


웃음이 터졌다. 순간적으로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듯, 끊임없는 수행 끝에 순간적으로 마음에 불이 들어올 때 그 밝음을 상상했던 것이다. 아침저녁의 기도도 나의 수행이지만 내 공부도 나의 수행. 그러고 보면 일상의 일 하나하나 수행 아닌 것이 없었다.


구도자가 되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돌이켜보니 나는 이미 구도자였다. 학문의 길을 걷는 구도자. 화두는 논문 주제. ‘스님들이 용맹 정진을 하듯 정진하자. 정중일여 동중일여 몽중일여의 단계로 나아가자.’『길 없는 길』을 읽으면서 다짐하고 더 이상 사이버 도량에 출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귀의삼보합니다.


한여름부터 한동안 사이버 도량을 수시로 넘나들면서 스님의 법문에 귀 기울이며 살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도의 길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가고 그 열망이 커지는 만큼 현실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날이 연속되고 있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스님께 하소연하고 싶은 생각이 일곤 했습니다.


얼마 전 ‘아픈 마음 시린 마음 만나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쪽지를 받고 스님의 따뜻한 마음을 진하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고마운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사이버 도량에 오지도 않는 까닭은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스님들이 용맹 정진 하듯 저도 학문적 수행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위 논문을 회향한 이후 다시 뵙겠습니다.


뵌 적 없이 뵈었던 스님께서 그 자리에 계셔 저는 참 고마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사이버 사찰에 왕래하는지 모를 테지만 내가 받은 은혜를 표현하고 싶어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때때로 눈앞에 나타나던 토굴의 수행자는 창을 열어두어도 보이지 않았다. 목탁 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자 스님들이 돌탑을 쌓고 있었다. 그 돌탑은 태풍이 몰아쳐도 쓰러지지 않는다고 했다. 돌을 하나씩 쌓을 때마다 온 마음을 담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하는 일에 그처럼 마음을 다한다면?


드라마 <황진이>에서 서경덕과 황진이가 나눈 인상적인 대화 장면이 떠올랐다. 예인은 어떠해야 하느냐는 황진이의 물음에 서경덕은 학인이 어떠해야 하는지 궁구할 때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이라고 하며 말린 국화를 꺼냈다. 찻잔에 그것을 넣은 다음 끓인 물을 부었다. 말린 국화는 물기를 머금고 온전하게 펼쳐졌다.


찻잔의 물에서 말린 국화가 제 모양을 펼쳐내듯이 봄볕을 만나면 자신을 발현하려고 내 안에서 내가 씨앗처럼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국화가 우러나 물이 국화 빛깔로 물들 듯이 자신이 피어 올린 꽃향기는 향 연기처럼 춤추며 퍼져나갈 것이다. 길가나 찻잔이나 어디서나 피는 꽃은 화광동진의 절정. 그러니 수행자가 되든 학인이 되든 예인이 되든 꽃을 품고 묻혀 있는 씨앗을 발현하는 것이 내가 할 일.



*제목은 이성부 시인의 <봄> 시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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