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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스방 Oct 14. 2023

긴장 풀려 망친 허니문

최선을 다해 팔을 벌리면 가슴도 열린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서 지인의 자녀 결혼식이 있었던 날이다. 

아내와 나는 성가대에 서서 두 사람의 앞날에 행복을 담아 주는 ‘사랑의 종소리’라는 축하곡을 불렀다. 

신랑과 신부의 행복한 가정을 위한 혼배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삼십여 년이 훌쩍 지난 나의 결혼 과정에 얽힌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덕수궁 프러포즈로 어색해진 만남을 반전시키려던 나의 말과 행동이 진정성이 있었던지 그녀는 결국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 말고는 결혼을 위해 준비된 것은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결혼 허락을 받으려 했을 때도 조실부모하고 혼자 성장한 사람이라 미덥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진솔한 모습으로 믿음을 드리는 것뿐이었다. 

진솔한 내 행동이 통했는지 마침내 부모님의 결혼 허락을 받고 본격적인 결혼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그녀의 종교인 가톨릭과 나의 개신교 교회 생활을 정리해야 했다. 

그녀의 마음을 진심으로 사로잡기 위해서 결혼 후에는 그녀의 종교인 가톨릭교회 생활을 하기로 약속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 교인들의 아쉬운 마음과 축하 인사를 받으며 나 자신에게는 하느님을 믿는 방식을 바꾸었다며 핑계를 대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는 마음이 무엇보다 간절했기 때문에 결혼식도 성당에서 하는 것으로 정하고 결혼 절차를 밟아 나갔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혼인의 신성성과 가정생활, 자녀 교육 등에 관한 교육을 받고 신부님과 면담을 거쳐 성당에서 결혼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세 유럽 가톨릭교회의 전통으로 그 당시에는 여자가 자유의지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와 압력에 의해서 자신의 의사와 상관이 없는 결혼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방지하고자 주례자인 신부님이 결혼 당사자들에게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혼하는지를 확인하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가톨릭교회 결혼식에 남아있었다.  

    

가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신랑과 신부가 가톨릭 신자이어야 결혼할 수 있다. 다만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과 결혼하려는 경우 결혼 당사자들은 교회에 대한 믿음, 자녀의 세례, 부부 생활, 혼인 예식들에 관해 서약하고 관면을 받고 결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가톨릭의 교리도 받지 않은 비신자로 관면혼배를 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녀가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과 개별 면담이 이루어졌다.    

  

스페인 국적의 신부님은 한국에 오신 지 오래되신 듯 우리말도 유창하고 면담 분위기가 딱딱하지 않게 유머를 섞어가며 대화를 이끌어 주셨다. 내가 개신교 교회의 신자라고 밝히자 부부간에 종교가 다르면 가정생활이 쉽지 않다며 되도록 하나의 종교로 가정을 이루면 좋겠다고 하셨다. 

신부님은 한국에서의 오랜 경험으로 가정불화의 원인이 지나친 술버릇으로 도박에 빠지게 되기도 하고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과 바람도 피우게 된다며 술을 절제하라고 하시고 행복한 결혼을 축복해 주셨다. 


결혼식을 혼자 준비하려니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았다. 

결혼식장을 전철역에서 가까운 성당으로 정하고자 성당에 찾아가 승낙을 구하고 인근 식당에 피로연 장소를 마련했다. 결혼식 날짜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내가 다니던 교회에 목사님을 찾아갔다. 

결혼하고 가톨릭교회에 나갈 것이라고 말씀드리니 목사님은 아쉬움이 가득한 미소로 행복하게 살라고 이르셨다. 교회 단체 활동을 하면서 알고 지내던 교인들도 아쉬움은 매한가지였다.      


몇 달 동안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덧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결혼식 전날 이런저런 생각에 이리저리 잠자리를 뒤척이다가 선잠이 들었다. 

헐레벌떡 아침에 일어나 결혼식 일정을 체크하고 결혼식을 도와줄 친구들을 기다렸는데 약속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친구들이 오지 않았다. 

급한 대로 피로연을 할 식당에 들러 떡이며 과일 상자를 옮기고 서둘러 성당으로 향했다. 


그동안 결혼식을 혼자 준비해 오면서 결혼식 당일도 이것저것 참견하다 보니 마치 다른 사람의 결혼식을 도우러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축하객들을 맞이하고 다소 길게 느껴진 혼배미사를 마치고는 도망치듯이 신혼여행지인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전국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요즈음처럼 해외여행이 일상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신혼여행지는 제주도가 단연 최고였다. 

자유여행을 즐기는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 제주도의 신혼여행은 전국에서 결혼식을 막 마치고 온 신혼부부들이 처음 만나서 단체로 버스로 관광지를 여행했다. 

그 시절에 제주도 단체 신혼여행은 학생 시절 단체 수학여행에 익숙해져 있는 여행문화와 여행경비도 아낄 수 있어서 신혼부부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여행안내원은 여행 가방을 버스에 싣고 바쁘게 공항을 빠져나가며 여행 일정과 개별 활동의 주의점을 제주 사투리를 써가며 재미있게 전달해 주었다. 

버스로 관광지를 이동하면서 중간중간에 어색함을 덜고자 레크리에이션 게임도 하다 보면 서로 친해져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즐겁기는 했지만 전 날밤 잠도 자지 못하고 그동안 결혼식 준비에 지쳐서 그런지 몸이 천근만근으로 피곤이 몰려왔다. 게다가 따뜻한 제주도라도 3월 초 날씨가 약간 싸늘하고 비도 내리고 해서 그런지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꼈다. 


나는 그날 일정이 빨리 끝나고 호텔로 가서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지만 개별행동이 어려운지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호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호텔 방에 들어섰더니 몇 시간 동안 불편함을 참아서인지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동안 결혼식 준비에 바쁘게 지내고 결혼식 당일도 긴장하고 지내면서 제주도에 도착해서 긴장이 풀이면서 비가 오는 싸늘한 날씨에 감기몸살이 온 것 같았다. 


아내가 된 그녀가 내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많이 난다고 서둘러서 약국을 찾아 약을 지어와 먹었지만 밤새 열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신혼 첫날이 엉망이 되었다. 그녀는 끙끙대는 나를 간호하느라 밤새도록 연신 수건을 찬물에 적셔 내 이마에 열을 내리려고 애쓰며 온갖 걱정에 잠을 설쳤다.      

유난히도 길었던 밤을 지내며 아침까지도 몸의 상태는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지만 아내에게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면서 단체여행이라 어쩔 수 없이 으슬으슬한 몸을 버스에 싣고 제주도 여행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혼여행 마지막 날에 나의 몸 상태도 거짓말같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여행 일정 동안 잔뜩 찌푸렸던 날씨도 화창하게 개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아쉽게 만들었다. 

신혼여행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즐겁지 않았을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 다음에 더 멋진 제주도 여행을 하자는 위로의 말로 신혼여행을 마무리했다.  

    

옛말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한 번은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태어나고 성장하여 어른이 돼서 결혼으로 두 번째 태어난다고 한다. 이렇듯 사람이 살아가면서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이 두 번째 태어나는 순리적인 삶으로 결혼을 ‘인륜지대사’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이들은 결혼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다른 것 같다. 

결혼이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그렇지만... 

“서로 믿음 안에서~ 서로 소망 가운데 서로 사랑 안에서~ 손잡고 가는 길”

삼십여 년 전의 나의 결혼식에서 들었던 축가’를 소프라노인 아내와 베이스인 내가 화음을 맞추어 부르며 결혼으로 축복받은 젊은 부부를 향하여 새로운 가정의 탄생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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