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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스방 Sep 09. 2023

'꿀' 알바와 '생계형' 아르바이트

주어진 것에서 느끼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길을 걷다가 상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오래전 토요일 밤을 기다리게 했던 ‘주말의 명화’의 오프닝 시그널 음악인 '영광의 탈출' 테마음악이었다.      

이제는 추억 속에 남아 있지만 그 당시 ‘주말의 명화’는 한주의 마감과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을 연결해 주었던 독보적인 존재로서 인기가 높았다. 


1960년대부터 방송을 시작해 40여 년 동안 이어온 ‘주말의 명화’가 이제는 영상매체의 발전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영화를 볼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지면서 종영된 것 같다.     

 ‘주말의 명화’에 대한 추억을 오랫동안 잊고 살아오다가 우리 집 아이들 덕분에 아내와 함께 한동안 주말마다 영화관을 들락날락거렸다. 


우리 집 아이들 셋이 대학을 다니며 순서대로 해를 걸러서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했다. 

좋은 영화도 보고 돈도 버는 소위 말해 ‘꿀알바’를 하는 아이들이 준 영화 초청티켓으로 우리 부부는 ‘주말의 명화’의 추억을 되새기며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이 대학 시절에 즐기면서 체험했던 꿀맛 같은 아르바이트와는 달리 나는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에 합격하고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해서 입학은 했는데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여기저기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가 학교를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어 할 수 있는 출판사 책 판매 외판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입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책 판매 아르바이트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과 함께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 잡일을 하면서 생활해야 했다.     

책을 판매하는 일에 노하우가 없다 보니 주변에 지인들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고 점점 부담스러워지면서 서적 외판원 아르바이트는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건설 현장 잡일은 아르바이트 치고는 수입이 나름 괜찮았지만 무거운 벽돌을 등에 짊어지고 공사판 계단을 오르고 공사 자재를 옮기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루 일하면 며칠 동안 힘들고 온몸이 아파서 계속해서 일하기가 어려웠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우리 동네 방직공장 근처에 분식점을 차려서 돈도 벌고 대학 전공이었던 경영학을 일찌감치 현장에서 체험해 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음식 솜씨도 좋으시고 그때 마침 건강도 좋아지셔서 외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분식 장사를 하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모아두었던 돈과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돈과 합쳐서 살림방 하나 딸린 열 평짜리 분식집을 차렸다. 그곳은 방직공장 맞은편으로 공장에는 여자 기숙사가 있어서 분식집을 찾는 여공들이 많았다.      

이미 대여섯 곳의 분식집이 있었지만 대부분 장사가 잘되고 있던 터라 경험 없이도 잘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했다.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는 새로 생긴 분식점에 대한 호기심으로 손님이 늘어나다가 어느 순간 손님의 발길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가 분식집을 차린 80년대 초반에는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시기에 우리 일상 속의 큰 변화를 가져온 것들 중에 하나가 흑백텔레비전 방송이 컬러화되고 컬러 TV가 보급되기 시작된 것이다.     

경쟁하며 이웃하던 분식점들이 컬러 TV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컬러 TV 살 형편이 못되어 흑백텔레비전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우리 가게에는 손님이 점점 오지 않게 되었다.

그곳의 분식점들은 음식을 먹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방직공장 여직원들의 휴게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할머니의 건강도 나빠지셨다. 분식집을 차리자마자 맞은 환경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분식집을 그만두어야 했다. 


외할머니는 이모님 집으로 옮겨 모시고 어머니와 나는 월세방을 얻어야만 했다.      

좁은 골목 동네에 얻은 월세방은 부엌이 붙어있는 방 하나로 한 지붕 아래서 엇비슷한 생활 수준의 대여섯 가구가 얽혀 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었다.

      

80년대 초 도시에 동네 골목이 대부분 그랬듯이 이른 새벽이면 두부 장수가 종을 치면서 두부 사라고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소리에 놀란 개 짖는 소리가 두부 장사의 종소리와 섞여서 새벽잠을 깨우곤 했다.      

한 지붕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마당에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이었다. 


손에 신문을 구겨 든 아줌마와 시멘트 포장지 안쪽에 가장 부드러운 종이를 골라 줄을 선 여학생에 이르기까지 하루의 시작을 꿈틀거리는 배를 감싸 쥐고 소리 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과음으로 밤새 속이 쓰려 시달리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표정으로 통사정하는 옆집 아저씨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북적이며 하루를 시작했다.   

   

이렇게 골목집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충격적인 비보가 날아들었다.

직업군인으로 제대하고 시작한 작은 사업에 실패한 형님이 군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의 전역 축하 모임에 초대되어 참석했다가 시비가 벌어져 사망하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형님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여기저기 호소하며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무기력한 삶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세상은 처절한 슬픔만 가득하지는 않았다.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의 사모님이 나와 어머니의 딱한 사정을 아시고 우리를 도와줄 방법을 찾아 여기저기 알아보셨다.      


마침내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자신이 사시는 연립주택의 방 한 칸을 내어주시고 들어와 살라는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사생활이 오픈된 공간에서 함께 거주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방을 내어주신 것도 감사한 일인데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주셨다.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기에 염치 불고하고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는 회사 건물에 있는 커피와 음료 자동판매기를 관리하는 것으로 급여도 괜찮았고 시간 관리만 잘하면 공부를 병행하기 괞찮은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면서 몇 달 동안 끼친 신세를 정리하고 작고 초라한 집이지만 전에 살던 우리 집으로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더욱이 나는 군대 입대를 위해 휴학을 하고 입영 신체검사에서 육군 현역 판정을 받아 입영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형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머니를 부양해야 할 상황이 되어 군대 입영이 일시적으로 연기되었다.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선배가 병무청에 나의 가정 상황에 대한 진정서를 내서 아버지와 형이 사망한 부선망 독자로서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생계유지 곤란의 사유로 군대 입영을 면제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아 급기야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환자든 보호자든 누구에게도 편하게 지낼 수 없는 병원 생활은 한동안 나의 일상이 되었다.      

복학으로 이어진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병원에서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는 일이 몇 달간 계속되었다. 

병실의 철제 의자 세 개를 나란히 놓고 눕는 잠자리는 편할 수 없었고 새벽 시간에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의 발걸음 소리에 깨어서 잠을 설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몇 달간의 고된 병원 생활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병고에 시달리며 고통 중에서도 나를 기다리고 맞아주는 어머니가 있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용기와 큰 위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위 '꿀' 알바라 불렀던 아이들의 아르바이트는 나처럼 '생계형' 아르바이트가 아니더라도 사회를 내딛는 과정에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긍정적인 체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부유한 환경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가난을 물려주지는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기도 했다.      


“당신 오늘 또 코 골았어요”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아니 깜박 졸았지만 내용은 다 알아요.” 

얼버무리며 멋쩍게 응수하는 내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아이들의 '꿀' 알바 덕분으로 주말이면 영화관을 찾아 ‘주말의 명화’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던 시간은 내 삶의 생기 넘치는 활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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