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두더지
두더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장롱 문을 양쪽으로 벌컥 열었다. 열자마자 우수수 떨어지는 짐들에 시선이 뺏기고 익숙한 시선, 냄새들이 기억나게 했다. 집을 비운 지 꽤나 됐지만, 발 앞에 떨어진 짐은 온기가 아직도 느껴졌다. 자리에 앉아 온기가 나는 그것을 들어보니 ‘부담감’이었다. 두더지는 생각했다.
- 내가 언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친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주 마주치는 동물들과 대화를 이어갈 때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걸 넘어, 머리가 새하애지는 두더지 었다. 적당한 말을 머릿속에서 찾고 또 찾고, 그 말을 어떻게 느낄지 부담스러웠다. 집에서 뭐 하냐는 질문에 자신이 매일 굴을 파고 있다는 대답을 직설적으로 하기엔 창피했다. 그리고 매일 굴을 파는 소리를 들었을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그것을 알고 물어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두더지는 실제가 아니지만, 이미 짧은 대화 속에서 동물들의 머릿속과 자신의 머릿속을 수십 번 왕복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와 대화하고, 마주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부풀듯이 커져만 가고, 그 온도는 자신을 뜨겁게 데우는 데 충분했다.
그 부담감을 다시 두더지는 마주했다. 두더지 머릿속에 오랜만에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이 보였고, 그들이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마 두더지는 부담감을 보고 싶지 않아 장롱에 잘 안 보이는 곳에 넣어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담감은 아마 두더지가 용기를 내서 출전했던 굴파기 대회에서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냈을 때에도 해결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많은 이들 앞에서 발표하던 어린 시절부터 해결이 되지 않을지도. 아니면 언제나 그랬듯 두더지의 이야기보다 두더지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두던 엄마에게 언제나 자신을 해명하고 있을 때부터였을지도.
두더지는 이 많은 생각을 연기 해쳐버리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자리에 일어나 부담감을 가지고 부엌으로 향했다.
부담감은 꼭 반죽같이 말랑 축축거렸다. 그 위에 밀가루를 뿌리고 조물 조물 되니 축축한 느낌이 사라진 반죽이 되었다. 두더지는 치대면서 물이 부족하면 물을 넣고 치댔고, 다시 축축하다 싶으면 밀가루를 뿌려 치댔다. 아무 생각 없이 계속해서 치댄 반죽은 아까보단 봐줄 모양새였다. 치대던 반죽을 쪼개어 여섯 상자에 나누어 담았다. 그리고 한 반죽을 꺼내어 얇게 밀기를 반복한 다음 겹겹이 쌓았다. 쌓은 모양이 돌돌 말아놓은 양말 같기도 해서 풉하고 웃음이 터진 두더지는 스스로가 이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븐에 돌려나오니 양말보다는 먹음직스러운 페스츄리 같았다. 바삭하고 버터향이 나는 빵이 된 부담감의 6 등분 중 하나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정확히 말하면 만족스럽게 만든 건 두더지였다. 두더지는 입에 빵을 문 채 중얼거렸다.
-많이 시끄러웠지?
- 혹시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가 많이 시끄럽니?
- 내가 집에 공사 중이라 시끄러울 수도 있는데
- 아 미안 내가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시끄러웠지
어색하게 올린 입꼬리를 황급히 내린 두더지는 나머지 반죽 중 하나를 꺼내어 똑같이 만들었다. 다만 이번에는 안에 초콜릿을 넣어 향이 그득하게 했다. 만든 초콜릿빵을 들고 옆집으로 향한 두더지는 만드는 동안, 들고 가는 동안, 초인종을 누르기 전 집 앞에서 뭐라 계속 중얼거렸다.
-띵동
- 누구세요?
- 응 나야 옆집에 사는 두더지
- 어머 오랜만이다! 두더지야
짧은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것은 코끼리였다. 코끼리는 두더지의 옆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이웃이고, 두더지와 꽤나 왕래가 있었던 모양이다.
- 오랜만이다, 그동안 안보이던데?
- 아 그렇지 내가 어딜 좀 다녀와서, 오랜만이야. 그리고 이거
- 이게 뭐야? 맛있는 냄새가 난다!
- 초콜릿을 넣은 빵이야. 사실 우리 집에서 내가 굴을 좀 파는데 너한테 시끄러웠을 것 같아서. 그동안 미안했어
- 맛있겠다, 정말 고마워!
시끄러웠다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딱히 말은 없었지만, 빵을 받아 든 코끼리는 두더지를 측은하게 혹은 감동받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두더지는 그 눈빛으로 발 끝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까 나오던 길과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새삼 느끼는 두더지였다. 돌아온 집에는 여전히 치워지지 않은 짐이 한가득이었지만, 오늘 부담감의 2/6을 정리하고 나니 한결 전과 다른 집과 같이 느껴졌다.
두더지는 장롱 안에 있는 물건을 다 치우려 들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들어 자신의 기준에서 왼쪽, 오른쪽, 다시 장롱 안으로 넣었다가 뺐다가 반복했다. 그다음 날도 똑같이 그렇게 했고, 그다음 날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그리곤 그렇게 한쪽에 분류된 것을 한데 모아 넣어두기도, 이름을 붙이기도 하며 사부작거렸다. 다음날도 반복했고, 또 반복했다.
두더지는 이 일의 기한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보여주듯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하기 벅찬 날은 정리를 일절 안 하기도 했었고, 다시 굴을 파던 모습도 보였지만 이내 다시 정리를 하나씩 해나갔다.
두더지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곧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자랐고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표현이 두더지에게는 해결해야 할 큰 숙제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미해결 된 과제’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저번 화에서 두더지와 어린 사슴이 보여주었듯이, 미해결 된 과제는 오랫동안 반복되어 패턴과도 같이 습관을 만들고 이 습관은 수레바퀴처럼 반복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내게 소비되는 수레바퀴가 아닌 생산적인 수레바퀴를 다시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짐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떼어서 빵으로 만들고, 그 빵을 들고 코끼리에게 찾아갔던 두더지처럼 말입니다. 오래된 숙제는 그동안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 나이테를 그려왔으며, 얼마나 많은 주름을 만들어왔으며, 얼마나 많이 굳은살로 자리 잡혀왔을까요. 강력한 한방의 힘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매일매일 반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매일매일 반복해야지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코끼리에게 할 말을 연습했던 두더지가 또 다시 연습하고 실천해 보는 힘은, 이제 곧 자신이 자신을 꺼내어 도와줄 따뜻한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며 진실된 격려가 될 것입니다.
지독하게도 반복되었던 습관과 반대되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야지요.
오늘도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힘으로 살아가고 버텨내 가는 스스로를 위해, 그 길이 어렵고 힘들고 어색하지만 가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