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두더지는 개미와 헤어진 뒤 철새들이 알려준 큰 바위 산으로 향했다. 날씨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눈이나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두더지는 뒤엉킨 자신의 옷장에서 서랍장을 열 때마다 안에 들은 잡동사니가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기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그 기분을 생각하니 우중충한 구름 낀 하늘이 자신의 기분과도 같았다. 어서 빨리 큰 연못 주인을 만나 정리를 부탁하고 방법을 알고 싶었다.
큰 바위 산을 찾아가는 길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산을 오르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산 중턱 즈음에 연못이 있다고 하였으니 중턱까지는 올라가야 하는데 가도 가도 산의 중턱은 나오지 않았다. 짤뚱한 몸뚱이를 짊어지듯 한 발 한 발 내미는 것이 이제는 못하겠다고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그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주저앉아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눈물이 무엇이라도 말하려는 냥 차올라 흘렀다.
-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뭘 해보자고 이렇게 지금 이렇게…
눈물은 말보다 빨라 두더지의 감정들을 담아 흘러내렸다. 땅굴 속에만 지내던 자기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밖을 나온 자신이 이렇게 노력해도 뭐 하나 쉽게 얻어지지 않아 서럽고 자신이 슬펐다. 그리고 지난 꿈에서 보았던 굳은살이 박힌 자신의 손이 떠올랐다. 고생하는 손이 산을 오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닮아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니 어느새 다시 설설 걷고 있었다.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아까워서일까, 오기와 억울함 그 사이쯤에서의 반동이 두더지를 일으켜 걷게 했다. 꼭 주저앉았어도 결국 두더지의 마음속에는 나침반처럼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흙탕물이 나오고, 돌이 험난한 길도 나왔지만 그 길을 건너지 않으면 갈 수 없기에 두더지는 또다시 기꺼이 걸었다.
어떠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더러웠고, 또다시 억울했고, 이따금 꺼려졌지만 그러한 마음이 자신의 집에 땅굴을 계속 파게 했기에 이제는 집에서 매일 만나는 마음을 더 이상 옷장에 미뤄두듯 넣어놓을 수 없었다. 미루고 넣어둘 옷장도, 그렇다고 가지고 있을 여유도 없었기에 두더지는 ‘그냥’ 했다. 꼭 아이를 위해서 더러운 것도 마다하지 않는 아줌마들의 억척스러움과 같은 모양새였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새, 자기 자신을 챙기는 마음이 씨앗처럼 움틔었다.
어느새 다다른 큰 연못은 철새들의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다. 연못이 두 개였고, 정확히 말하면 앞 연못과 뒷 연못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나뉜 연못은 연결되어 있었고, 뒷 연못에서 물길이 터 앞 연못까지 다다른 모양새였다. 앞 연못에 도달하자마자 두더지는 물을 허겁지겁 들이켰다.
- 아 살 것 같네-
두더지는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지가 조금 전인데, 살 것 같다고 말하는 자신이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디선가 찹찹찹 작은 발이 풀을 밟아 오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찹찹찹찹 그 리듬은 꼭 신나서 돋음 발을 하는 것 같았다. 소리가 커지고 앉아서 축 쳐져있던 두더지가 올려다보니 보인 것은, 산 풀을 입에 물고 총총총 뛰어오는 토끼였다.
- 어 네가 여기 주인이니?
두더지는 자세를 고쳐 앉고 물었다. 그러자 토끼는 가까이 마저 걸음을 마치고 풀을 내려놓고 말했다.
- 그래 내가 여기 주인이지, 너는 누구니 어디서 온 거야?
두더지는 자신이 여기를 왜 찾아왔는지, 누가 알려줬는지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난 토끼는 두더지 옆에 앉았다.
- 그래 잡다하고 쑤시는 마음들을 미뤄두듯 옷장에 넣어두었다고, 그리고 그게 이제는 정리조차 안된다는 말이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아? 정리를 찬찬히 해보면 되잖아
- 정리를? 내가? 어떻게 해. 방법을 알면 내가 여기 이렇게 찾아왔겠니
- 나도 정리를 해봤지만 아 뭐 그래서 철새가 내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내 짐이니 내가 정리했지. 네 짐은 누구보다 네가 잘 알지 않겠어?
두더지는 확 짜증이 났다. 알지만 감당이 안되기에 찾아온 것인데, 뾰족한 수를 말해주지 않는 토끼도 얄미웠고, 이번에도 자신이 미루었다는 것이 짐작 가서 답답한 마음에 화가 났다.
- 그니까 어떻게 하는 거냐고 정리!
- 그래 이제 말이 통하네, 네가 하는 거야 그 정리. 일단 버릴 수 있는 것부터 꺼내봐.
- 버릴 수 있는 거? 근데 누가 준 마음은 버리기도 애매해
- 그건 돌려주는 거지
- 어떻게?
- 어떻게든?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하든가, 너도 뭐라도 해주던가. 그러면 그 고마움이 짐처럼 남아있지 않던데. 이게 어떻게 느껴질까 너무 작은가 너무 큰가 이런 생각만 하다가 처박아둔 거잖아. 그거 해결부터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두더지는 그동안 오리에게 받아둔 고마움이 많았지만, 때때마다 잘 표현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더 무얼 하지 못했다. 고마움은 쌓여 부담이 되고, 고마운 오리가 꺼려졌다.
- 근데 만약 돌려주지도 못할 것인데 내가 버리지도 못한다? 그러면 이유가 있는 거지. 버리지 못하는 마음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는 거야
이유라… 두더지는 오랫동안 엄마를 미워했었다. 자신의 소극적이고 능동적이지 못한 모습을 꾸짖지도 않고 애써 칭찬도 않는 엄마의 모습이 말하지 않아도 무언의 답답함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 앞에서 화도 나고,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랐는데 그러지 않으니 미웠다. 그 미움은 버려지지도 않아 오랫동안 옷장 안에 처박혀 있었다.
- 그런 마음 있지, 어떻게 버려. 못 버리는 게 아니라 안 버려져. 계속 옷장에 있어. 난 꺼내서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그건 내 생각이고 사실 꺼내보고 싶지 조차 않지. 그렇게 까먹다가 또 생각나고 골칫덩어리야.
- 그래 버려지지 않는 마음들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그 이유를 적어다 붙여놔. 꺼내도 보기 싫으니까 정리도 안되니까 버려지지도 않으니까 일단 할 수 있는 건 이름이라도 붙여서 정리하는 것 밖에는 없어.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름을 붙여놓으면 나중에 정리하기 쉬워지더라.
- 뭐라고 이름 붙여..
- 또 이러네, 네가 정해야지? 너만 할 수 있는 건데
토끼는 꼭 옷장을 세 번은 치워 정리해 본 것처럼 말했다. 해주지도 않으면서 냉정하게 쏘아붙이는 말들이 이상하리만큼 안정되게 느껴졌다.
- 근데 이 연못은 왜 둘로 나눠져 있어?
토끼가 뒷 연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 아 저건 내 꺼고, 이 앞에 있는 건 여기 찾아오는 동물들에게 줄 물이야.
그러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허겁지겁 마셨지만, 앞 연못에는 키가 작은 동물도 마실 수 있게 돌받이도 있었고, 더 작은 동물도 마실 수 있도록 떠먹을 컵도 있었다. 큰 동물이 마시기 편하라고 위 쪽 나무의 나뭇가지는 다 다듬어져 있었다. 둘러보던 두더지의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음이 난 토끼는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그냥- 사실 전에는 내 연못에 물이 모자라면 누구한테 뺏길까 보초 서듯 쪼아 붙였는데, 이제는 내가 먹을 물보다 넘치니까 나눠줄 수 있는 거지 뭐.
근데 이 연못은 내가 채워야 해. 누가 채워주지도 않고 내가 열심히 해서 채운 거야. 너도 네가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두더지는 토끼를 만나기 전 열심히였던 자신이 모습이 떠올랐다. 개미를 합류하고 떠나보낸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이해한 일도, 철새에게 물어 이 길을 찾아온 일도, 산 중턱까지 기꺼이 오른 일도, 무엇보다 자신의 집에서 나오기로 한 일이 제일 잘한 것 같았다. 토끼는 두더지에게 쪽지하나를 건넸고, 정리에 대해 적혀있었다.
그렇게 두더지는 산에서 떠나 집으로 향했다.
수용전념치료라는 행동치료이론에는 ‘기꺼이 하기’라는 행동요법이 있습니다. 자신이 나아질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방해공작은 기꺼이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지요.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버스가 흔들거려도, 시끄러워도 기꺼이 몸을 맡기는 것처럼. 산을 오르기 위해 진흙탕 길을 넘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때때로 더 나은 길을 가기 위해 방해물을 겪습니다. 겪지 않으면 좋겠지만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관계와 세상 속에서 이러한 방해물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요. 그래서 그것을 두려워 길을 트는 것은, 버스 아저씨 핸들에 자신의 방향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수용전념치료에서는 말합니다.
두더지는 기꺼이 방해물을 건넜고, 버티는 길 속에서 자신을 무심코 챙기고 연민하게 됩니다. 말투도 전보다 좀 더 직접적이고, 심지어 토끼에게는 먼저 말을 걸기도 하지요. 자기 자식을 위해서 철판을 까는 아줌마처럼 자신을 위해서 자기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옷장에 정리하는 비유는 어디에선가 들은 것입니다. 상담사들은 내담자가 옷장을 직접 정리할 수 있도록 옆에서 보조만 할 수 있다고. 직접 꺼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 직접 꺼내는 것, 이름을 붙이는 것, 이유를 말해보는 것, 버리는 것, 돌려주는 것 모두 다 말입니다. 상담은 내담자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기다려주는 것뿐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렇게 두더지는 스스로 옷장을 정리하러 집으로 향합니다.
아 연못은 동료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것을 쓴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샘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샘이 채워져야 다른 이들에게도 나눌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샘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는 영역은 한계가 있고, 자기 자신이 채워야 하는 것이지요. 두더지처럼 자신에게 조금 더 자비롭고, 따뜻한 마음으로 자기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 누군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