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와 만남
두더지는 돌아오는 길에 보내는 시간이 길다고 느끼지 않았다. 땡볕의 길에서 개미를 만나고, 걷고 걸어 드넓은 평야에서 잠을 청하고, 지나가는 길에 마주한 추수가 끝난 밭에서 철새 떼를 만나 큰 바위섬을 알게 되고, 큰 바위섬에서 토끼를 만나고 돌아왔던 이 모든 길에 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마치 지금 돌아가는 이 시간을 위한 지난날이었던 것처럼 마음 한켠에 정리되었다. 그렇게 집을 향해 돌아오는 숲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먼 곳에서 바사삭 풀 잎이 구겨지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누구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다 또 ‘바사삭’ , 소리가 나는 왼쪽 방향에 왼 작은 노루 한 마리가 풀 숲에 숨어 덜덜 떨고 있다.
무슨 용기에서인지 두더지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자, 그 노루는 순식간에 펄쩍펄쩍 뛰어대며 도망가기 바빴다. ‘나 때문에 놀란 것 같은데 괜스레 미안해지네’ 생각을 마치며 다시 왼쪽 켠에 나와 가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이켰다. 또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가 갑자기 번쩍하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군가와 크게 부딪힌 것 같은데, 두더지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했다. 오른쪽에는 그 노루가 쓰러져 있었다. 놀란 두더지는 자기의 놀란 마음을 얼른 추스르고 다가가 물었다.
- 괜찮니?
- 어… 괜찮아
- 아까도 우리 만났었지? 무슨 일… 있던 거야?
- 아, 아니 내가 가는 길이 아니라서
다리를 다친 노루는 겁을 잔뜩 먹었고, 두더지는 노루의 덜덜 떠는 모습에서나 뒤로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에서나 그걸 느낄 수 있었다.
- 내가 도와줄게. 어디 사니? 괜찮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걸 도와줄 수 있어
노루는 끄덕였고, 두더지는 자신의 키보다 두세 배는 큰 노루의 발을 맞춰 걸으며 부축해 걸었다. 노루의 집에 다다르자 두더지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아까 왼편에서 바스락 소리를 들었던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운데에 동물들이 흔히 지나다니는 길을 기준으로 왼편이 노루를 마주친 곳이라면, 바로 오른편에 노루의 집이 있던 것이다. 둘 사이의 거리는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 여긴 아까 우리 마주친 곳 아니니? 크게 돌아왔던 거구나
노루는 집 앞, 쓰러진 습한 통나무를 지팡이 삼아 한번 절뚝이다 이내 땅에 편히 엎드렸다.
-응 아까는 너를 보고 무서워서. 그 길을 지나다닐 수가 없어
-왜?
-그 길은 너처럼 다른 동물들이 많이 지나다니잖아.
-그렇지
-내가 뭔가 방해될까 봐
-뭐가?
자꾸 말이 안 통하고 본인이 찌르듯이 묻는 대화가 이어진다고 느낀 두더지는 질문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노루를 이해하고 싶었다.
-네가 뭔가 방해가 되는 게 싫구나
-응 그렇게 하면 날 싫어할 것 같아. 그래서 돌아서 가는 거야 되도록 말이야.
두더지는 처음 노루를 마주치는 순간에 자신을 피한다고 느꼈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피해 준 것이란 말이 알쏭달쏭스러웠다.
-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네가 날 싫어하는 것처럼 느꼈어. 마주칠 때 화들짝 놀란 것이 내가 그런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고. 미안해 그렇지만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어.
- 아니야 사과는 내가 해야지. 나도 이렇게 피하는 게 좋지 않다는 걸 아는데, 잘 안돼 사실…
다시 목소리가 작아지는 노루에게 두더지는 주저리주저리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노루의 집 앞에서 해지는지 모르고 한참을 이야기하면서 노루는 말했다.
-근데 상상이 안된다. 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정리하자는 생각 하나로 바뀌었다고? 대단하다!
-정리는 가서 해봐야지 알겠지. 그렇지만 계속 반복되는 걸 이 무언갈 깨고 싶어. 노루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응 나도 정말 그러고 싶어
두더지는 그날 밤 노루와 같은 마음으로 대화를 잇고 또 이었다. 그렇게 노루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와 다시 집으로 향했다.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저에게도 있어요. 저는 늘 사소하고 작은 일상의 불안한 일들이 터지면, 그 불안을 감당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끼고, 그런 날 받아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이에게 그걸 쏟아내죠. 마치 그 사람이 저에게 “너 불안하지”라고 꼬집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무시받는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는 아주 정당하다고 느끼며 화를 내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며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투사하고 나면 내가 불안한 게 아니었다는 것의 확인증을 받는 것처럼 다시 말끔해지지요. 겉만 말끔하지, 다시 또 해결되지 않는 불안은 사소한 돌부리에 걸려 터지고 위를 반복하고 맙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이러한 오래도록 반복된 이 일은 일종의 옷감 패턴처럼, 깨닫지 못할 때 무수히 일어났습니다. 상담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 패턴을 깨기 시작했고, 지금도 단단히 노력 중이지요.
두더지는 자신의 감정을 개방하고 표현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그런 부담을 느껴 표현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곤 더욱 표현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다보니 상대에게는 대답 없이 돌아오지 않는 반응이 달갑지 않게 되죠. 그러다보니 멀어지는 상대를 보며 두더지는 다시 다짐합니다. 상대는 어렵다고, 표현은 어려운 것이라고.
노루는 유능하지 못한 자신을 역시나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런 스스로가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남들의 시선에서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지레 겁을 먹어 피하게 됩니다. 그런 피하는 행동 역시 상대로 하여금 달갑지 않고, 그러한 반응을 보며 ‘역시 남들은 날 싫어해 난 괜찮지 않은 존재야’라고 단단히 돌아옵니다. 그러기에 다시 회피하지요.
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패턴을 하나씩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생산적이든 파괴적이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음 화에서는 이런 패턴을 어떻게 깼는지 저의 이야기를 역시나 녹여낸 일화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