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ept: 받아들이다(기꺼이)
Commitment: 약속, 전념, 헌신
액츠에서 말하는 수용전념은 영어로 해석하면 위와 같다. 수용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역시 “받아들이다”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질문해볼 수있다.
나는 무얼 못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지만, 내 뒤에 유령처럼-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어 평소엔 잘 모르는 나. 그래서 불쑥 올라오면 이 또한 나라고 못받아들인다.
사소한 다툼에 매사에 진지하고 무시받지 않으려 애를 쓰는 어린아이 모양새를 하고 있는 나와 달리, 남편은 사과가 참 쉬운 사람이다. 늘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갈등에 자신의 책임을 지려했다.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여보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꼈을 수 있겠다. 미안해. 근데 정말 여보를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어”
어디 교과서에 나올 법한 완벽한 문장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요청한다. 그에 비해 난 마음 속이 단단히 삐쳐 저 숲 너머 동굴로 숨어버리는 일탈 청소년마냥, 도망가고 시비걸고 비아냥거렸다. 우리는 7년 연애동안 이런 패턴을 반복했고, 그 때마다 나는 항상 모나있었고 남편은 성숙하게 화해를 시도했다. 이런 모난 나의 모습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장 이해받고 싶은 사람에게 나타나곤 했다.
[자존감에 대한 고찰—3]에서 내가 왜 그토록 삐뚤어진 모양새를 가지고 있는지 어린시절을 정리해봤다. 그래서 여기선 어린시절에 대해 설명은 넘어간다. 다시 돌아와서 남편과 항상 어른과 일탈청소년의 관계로 갈등을 마주하면 할수록 난 20대때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에 빠졌었다.
”성숙치 못한 이 못난 모습은 언제까지 날 괴롭힐까, 참 못났다 못났어“
“그래도 화가 나는걸. 쟤가 잘못했는 걸. 난 잘못없어 난 피해자야”
연신 속으로 외쳐대며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다 불쑥 불쑥 올라오는 나를 혐오했고, 방패막이 삼았다.
결론적으로 날 수용하게 만든 건 거울이었다. 스스로 귀하다- 값지다- 그럴수있다- 라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누군가의 입으로 대신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은 실수를 하면 엄마 얼굴 먼저 쳐다본다. 엄마가 웃으며 “괜찮아 괜찮어”라고 말해주면 아 이래도 괜찮은거구나 느끼고, 엄마가 한숨쉬거나 찡그리면 아 이게 뭔가 잘못된거구나 느낀다.
나 어릴적엔 단일 최고 영웅은 ‘천사소녀 네티’었는데, 당시 네티에 빙의해서 문을 따보자고 클립으로 잠근 문을 따보려다 그만 문이 고장났었다. 한시간 넘게 조용히 사부작거리는 내가 수상했는지 엄마는 뭐하냐며 찾아왔고. 뒤로 황급히 숨긴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나의 손에서 부러진 클립과 고장난 문을 발견한 뒤 웃어버렸다. 그러자 나도 희미하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혼날줄 알았던 일이 그렇게 해프닝으로 넘어갔고 아직도 웃음이 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부모를 통해 알게 된다. 그래서 도덕적 기준과 행실에 대해 처리하는 전두엽을 “부모에게 빌려온 뇌”라고도 한다.
하지만 전두엽이 성장을 마친 후에도 내 행동의 잘잘못과 가치판단이 스스로 서지 않을 때가 있다. 뭣보다 그 대상이 자신일수록- 숨어있는 자아의 문제일수록- 판단의 난이도가 올라간다.
나의 못난 모습을 수용해주려 노력한 건 당시에 남자친구, 지금의 남편의 큰 역할이 있었다. 누군가에겐 그런 역할이 부모. 순간 떠오르는 절친한 친구. 길을 잃을 때 찾아뵙는 선생님. 혹은 선배. 형제 자매이겠다. 이마저도 없어도 된다. 나에게는 완벽한 남편이었지만, 남편도 사람이기에 늘 내 모습을 성숙하게 받아줄순 없었다.
언젠가 이러한 답답함이 쌓이고 갈증이 날 무렵, 수련도 채울겸 집단 상담에 참가했다.
처음보는 사람들, 낯선 이름(집단 상담에서는 이름과 나이를 숨기고 별명을 부른다)으로 만나 누구에게도 한번도 꺼내지 않았던 내 속 이야기를 꺼낸다. 잘 갈린 칼과 같은 숙련된 리더의 지휘 아래 문제 하나하나가 만져진다. 비슷한 이야기에 울고 위로를 주고 받는다.
집단 상담 한번으로 해결될순 없겠지만, 마치 거울에 비추어 내 머리 손질 하듯이 내 문제를 어찌 다루는지 배운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랴- 모난 것 자체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치만 찔리는 사람이 있지 않도록 고쳐나가보랴- 타이르고 안아준다.
집단 상담후 또 다시 남편과 부딪히고, 나는 도대체 왜그럴까에 자책하던 어느 날. 방에 혼자 들어와 집단상담에서 리더가 해주었듯 따라 날 품으려했다. 오글거리지만 이름을 불러가며 속으로- 육성으로 말해줬다. ”사실은 화난게 아니라 섭섭했던 거구나, 괜찮아 숨비야(집단상담때 쓰는 내 별명이다). 그랬을수 있어. 섭섭했으니까“ 뜨거운 눈물이 와다닥 쏟아지고 울음을 우겨넣다 흘려버리고 나면- 진정이 되고 내 잘못을 사과해야겠단 욕구가 올라왔다. 그렇게 30대가 넘어서야 난 미안하단 말을 어렵게 하기 내어주기 시작했다.
액츠가 인지행동치료이긴 하지만, 행동의 방법론으로썬 드라마틱한 변화가 쉽지 않다. 내 속에서 날 수용해주고픈 마음이 떠올라야 한다. 길고 긴 새벽을 이기고 결국 뜨고마는 태양처럼. 그 새벽을 버텨내고 나면 사람은 스스로 나아가고자 하는 동물이기에 나아지고픈 욕구가 결국은 굴러가게 만든다.
그렇게 나는 여러 모델들을 거울 삼아 못난 나까지 수용할때, 비로소 온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고 잃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도 수용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있다. 여전히 뒤에 있다 “워! 나 여기있는데 몰랐지!!”라고 확 튀어나오는 내 못난 모습이 있지만. 순간의 수치스러움을 지나보내고 난 뒤, 추스리고 정리하며 그마저도 나임을 받아들이려한다.
받아들이자. 받아들이려하지 않으면 결국 뒷 승객 불평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뺑-뺑 도는 버스가 된다(자존감에 대한 고찰_4 참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 사람 탓을 하며 망쳐진 파티를 뼈에 새기며 울분을 토하는 피해자가 된다.
기억하자- 당신에게는 분명 당신을 좋아하고 걱정하며 안아줄 사람이 주변에 있다. 그들이 당신을 대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대하자.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는것처럼, 내 안에 가장 못난 나를 유일하게 잘아는 내가 받아주자! 그 못난 나도 나인 걸, 누구하나 안아주지 않아 삐뚤대는 것임을 측은히 여기고 받아주자.
참 고된 일이다. Accept까지 오는 일이. 그러고 나면 나에게 약속하고, 또 날 위해 전념하는 일이 남아있다. 날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약속에 크게 늦지 않으면 언젠가 Commitment에 도달하고 치유의 힘을 맛볼것이다. 온전히 따뜻해지는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