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위하여
어쩌면 우리의 피에는 헤모글라빈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이 흐를지 모른다. 양치할때 물끄라던 아빠의 지겨운 잔소리가 진절머리나는데도 나도 모르게 양치할때면 물을 한모금 알음한 뒤 바로 물을 끈다. 출산과 동시에 일이 끊겼던 것이 한이 되어 “여자는 일을 해야한다”고 입에 달고살았던 엄마 말이 와닿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일을 안하면 내 역할을 잘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고 만다.
우리의 피와 골수에는 양육자의 시선이 녹아들어있고, 좋든 싫든 그 영향을 부인할수 없다. 남편은 가정적이지 못하셨던 아버님과 자식에게 희생적이셨던 어머님을 새겨, 그 반대로 하려든다. 우리 가정이 무엇보다 우선이며, 자식보다는 부부가 먼저란다.
나 또한 결혼이후에,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고 친정에서 하룻밤도 자지 않은 것은 지금의 생활의 만족하기 때문이다. 딸로서의 모습을 갖춰도 집에 있는 내내 딸, 누나로 있기보다 지금의 남편 옆 아내가 더 좋다.
딸로서, 누나로서 삶이 불행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 않다. 하지만 작고 하찮은 모남때문에 방지턱 걸리듯 이따금씩 덜컹거린다. 그렇기에 그만 원가정에서의 모습은 점점 내려놓고 지금-여기에서의 나에게 더욱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여기에 일어난 일들은 때의 거기 일에 영향을 받았기에, 남편과의 갈등에서 어린시절 결핍의 내가 울어버리곤 한다. 친구와의 갈등에서 동생에게 양보하며 다가지지 못했던 내가 뾰족거리곤 한다.
마음이론(Mindfullness); 마음챙김으로 잘 알려진 이론에서는 지금- 여기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명상, 그 속의 호흡으로 지금 여기에 살아숨쉬는 나를 감각으로 일깨우곤 한다. 더 거슬러올리가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환자들이 플레시 백; 그 장소, 그 사람의 기억에 매몰될 때, “여긴 어디죠? 무엇이 보이나요”, ”무슨 내음이 날까요?“, ”지금 발가락 감각은 어때요 뭐가 느껴져요?“ 질문하며 지금 여기의 감각을 돛 삼아 돌아오려는 시도다.
과거에 벗어나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 위해,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성내지 않아도 될만큼 충분하기 위해,
더 이상 초조하지 않고 따뜻함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그런 존재가 되길 바랬다. 생각이 많고 결핍 덩어리인 나보다 따뜻하고 온전히 서있는 내가 되기 위해 삶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채우기로 했다. 글쓰기, 손 뜨개, 명상-요가.
요즘 아기가 이 앓이중이라 잠을 짧게 자는데, 자는 동안 해야할 집안일이 늘 밀려있다. 요가수업이 있는 요일이면 더욱 낮잠을 빌려 시간을 쓰기 어렵다. 지금도 아기가 깨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조마조마하며 글을 펼쳤다 정리하기 바쁘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엄마로 살아가는 시간이 빼곡하지만, 내 존재를 위해 오늘도 낮잠시간을 빌려 내가 좋아하는 글을 써본다.
글은 나에게 공중에서 분해되는 아우성을 정갈하게 차려 정리하는 수단이다. 또 하트를 눌러주는 사람들로 인정도 누리는 수단이며, 주변에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들- 잘쓰는 멋진 사람들 따라가는 흉내이다. 그렇게 글을 오래 쓰다보니 내가 쓴 글을 모아보면 주제가 하나로 모아지기 쉬웠는데 결국,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맥락을 같이 한다.
따라하세요 여러분.
그 때 거기에 영향을 받았을지라도, 지금 여기에 숨쉬어 살아있다. 내 존재에는 어떤 것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다.
오늘도 쓰러지고 상처받고 못나, 엉클어지고 들쑥날쑥인 수많은 존재를 위하여
(존재를 위하여 시리즈 글이 몇개 더 있어 링크를 걸어놉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forex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