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자 날이 제법 쌀쌀해졌고 해는 빨리 떨어졌다. 10월까지 가을 햇살을 즐기던 사람들은 아늑한 실내 공간을 찾았고, 히터 빵빵하고 담요까지 구비된 만화카페는 꽤나 매력적인 장소였다.
남편은 손님이 많지 않았던 9월과 10월에도 주말 알바 2명 체제를 계속 유지했다. 오전 1명, 오후 1명으로 중간에 살짝 겹치는 시간을 두어 서로 돌아가며 쉴 수 있도록 했다. 알바생들이 쉬다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한가로울 때도 있었지만, 시험이 끝난 주간에는 일시적으로 매장이 바글바글 했고, 갑자기 비가 온다거나 찬바람이 불면 손님이 일시에 몰려오는 경우도 있어 주말 알바 2명 체제는 꽤나 합리적이었다.
어느 날 그중 한 명이 갑자기 그만뒀다. 가끔 일이 있어서 미리 양해를 구하고 못 나온 적은 있지만(이때는 내가 땜빵 당첨) 아예 그만둔 것이다. 게다가 준성수기에 접어들 무렵이었으니, 나에게는 무리 없는 이중생활의 종말을 예고했다.
남편 : 당분간 토요일이랑 일요일 오전에 나와줄 수 있어?
나 :일요일에는 회사 일을 해야 하니 4시에 칼퇴근할게. 금방 또 뽑을 거지? 똘똘한 친구가 들어오면 좋겠다.
흔쾌하진 않았지만 사정이 눈에 빤히 보이니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난 이미 설거지 머신이고, 포스기 메뉴 위치는 여전히 헷갈렸지만 잘하는 척 둔갑해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스킬이 장착되었으며, 입장 시 성인/학생 구분에 따른 이용 시간 등록쯤은 거뜬히 할 만큼 익숙해졌다. 프라페는 여전히 못 외웠지만 에이드는 레시피를 보지 않고도 제조할 수 있었다. 겨우 반쪽이에서 3분의 2쪽이 알바로 성장했다.
4시면 오후 알바생이 출근하므로 마감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내가 할 일만 하고 마치면 된다. 평일에는 남편 혼자 있으니 마감 이후 청소를 하지만, 주말에는 알바생들이 있어 마감 타임은 바닥 걸레질을 하고, 오픈 타임은 선반의 먼지를 닦는다. 남편은 오픈 타임 청소나 정리 업무는 본인이 하겠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시급 0원 알바에게 너무하시네요
추운 날, 손님들은 강남으로 떠나는 제비처럼 따뜻한 곳을 찾아 매장 안으로 줄줄이 들어왔다. 음료를 제조하다 말고 손님을 응대하고, 바로 또 퇴실하는 손님이 나오니 계산으로 이어졌다. 개인당 이용 카드를 등록하는 시스템이지만, 여러 명이 하나의 카드에 음식 주문을 몰아넣고는 각자가 먹은 메뉴만 계산해달라며 현금을 내밀었다. 복잡다단하게 계산 과정을 마쳐야 했다. 그 사이에 왜 음료 주문한 게 안 나오냐며 궁금해하는 손님도 있었고, 아이폰 충전기를 빌려달라는 손님도 있었다.
아차차 음료를 제조하다 말았지. "푸악! 아이고ㅠㅠ" 급한 마음에 작은 몸을 너무 크게 휘둘렀나 보다. 끈적끈적한 아이스티가 조리대 위에 쏟아졌다. 컵 속에 갇혀 있던 무형의 갈색 액체는 자유로이 유영하며 커피머신 아래로도 들어가고, 정수기 아래로도 들어갔다. 야야, 거기 들어가 봤자 볼 것도 없어 그만 좀 움직여. 자유를 찾아 나선 액체가 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고체라면 말 들었을 텐데. 액체라는 물질 형태가 한없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만화카페에서만큼은 고체 액체 기체 중에 액체를 제일 싫어하게 되었다.
"IC 뭐 하는 거야! 바빠 죽겠는데"
오랜만에 남편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독수리 오 형제 멤버였다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무기를 장착한 캐릭터로 활약했을 거다. 상상 초월 강력 발사로 에이스 또는 히든 조커였을지도 모르겠다.
"사고 좀 치지 마."
남편은 커피머신을 번쩍 들었고 나는 마른행주로 자유롭게 유형하는 액체들을 잡아냈다. 그 와중에도 서로운 것은 팔이 짧아서 저 안쪽까지 흘러들어간 애들은 잡지 못했다는 거다. 남편은 그 정도면 되었다고 하며 조리대에 거치된 정수기를 들었다. 검거 완료. 조리대 위 액체들은 다 소멸되었지만 내 분노는 소멸되지 않았다.
"내가 사고 치고 싶어 치는 거 아니고, 너무 정신이 없었어. 돈 받고 일하는 것도 아닌데 정말 너무하네. 알바 빨리 뽑아. 나 같은 반쪽이에 사고뭉치가 나와서 뭐해."
사고 한 번으로 다시 반쪽이 등급으로 내려왔다.
이후 우리 부부는 서로 말이 없었고 난 4시에 출근한 알바와 교대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오는 길에 사 온 버블티를 홀짝 거리며 식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주말이었지만 알바 한 탕 뛰고 와서 회사원으로도 출근했다. 화요일 아침에 예정된 회의 준비를 시작했다. 월요일에도 마쳐야 할 일정과 과업이 있었기에 화요일 회의 준비는 일요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오전부터 알바를 안 갔으면 맘 편히 업무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싶기도 했다. 아니야, 주말에 해야 할 업무가 있으면 그게 쉬는 거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알잖아. 마음은 못 쉬는 거.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그 와중에 진짜 감사한 건 아이들이 스스로 잘 커줘서 배달 음식을 시켜주면 알아서 먹고 알아서 치울 줄 알게 되었다는 거다. 식탁에는 떡볶이 국물이 곳곳에 튀어 있었지만 꽤나 준수했고 개수대에는 개인 접시와 포크가 담가져 있었으니 꽤나 고마웠다. 난 엄마였지. 새삼 아이들에게도 미안해졌다. 주중에도 일만 하는 엄마가 만화카페가 뭐라고 아이들에게 주말에까지 배달 음식이나 먹이고 참으로 불량하구나 생각했다.
알바생, 회사원, 엄마 모두 뭔가 불살라 하고는 있는데 뭐하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애매하게 퍼포먼스가 분산되어 자괴감마저 들었다. 손에 든 컵에 끈적끈적한 아이스티가 흘러넘치는 것 같은 찝찝함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지 슬픈 건지, 아이들은 엄마 요리보다 배달 음식을 더 맛있게 먹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해준 음식은 이렇게까지 싹싹 비우진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