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지만 내 하루를 살아가는 기쁨
내 도화지에 왜 당신들이 그림을 그려?
매장 출근 후 남편은 매번 똑같은 일과를 시작한다. 아직 한 밤 중인 텅 빈 가게를 깨운다. 문을 따고 불을 켠 후 창문을 열고 슬리퍼로 갈아 신고는 포스기를 켠다. 매장을 돌며 에어컨이나 히터를 켜고 카운터 위 모니터를 켠다. 인덕션을 켜고 커피 머신을 작동시킨다. 전날 말려놓고 간 튀김기 부속을 제자리에 거치하고 행주는 필요한 것만 놔두고 개어둔다. 밥을 짓고 나면 야채를 꺼내 필요한 분량을 썰어 놓고 감자튀김 등 재료들을 소분한다. 숨 막힐 정도로 매번 똑같다.
아우 지겨워 라고 생각할 즈음,
"아고 끝났다"
남편은 개운한 소리를 내뱉고 카운터 접이식 의자에 앉는다. 사장님 의자다.
같이 출근했으니 커피는 내가 내려본다. 남편이 캬라멜마끼아또나 바닐라라떼가 아닌 아메리카노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다. 세상 만들기 쉬운 메뉴니까.
한 손에 든 아메리카노를 몇 모금 마신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한 후 유튜브나 캐주얼 게임을 켠다. 이제부터 딸랑딸랑 손님이 문 여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 순도 100%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
여기까지가 남편의 출근 후 루틴이다. 휴식 시간을 포함해 대략 1시간. 잔잔바리로 할 일을 계속하다 끝났다는 기지개와 함께 몸과 마음을 놓는다. 마치 빈야사 요가처럼 물흐르 듯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이어가다 완벽히 쉬는 사바아사나로 마무리하는 느낌이다. 동영상으로 남겨 놓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매번 남편의 외적 상태가 별로라서 마음을 접었다.
문득, 매일 아침마다 모든 걸 새롭게 세팅하고 밤에는 다시 싹 정리하는 일상이 하루살이 같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털어내고 다시 하루를 맞는다. 매일이 리셋이다.
출근하면 언제나 새하얀 도화지가 놓여 있고 한 줄 한 줄 선을 그으면서 밑그림을 그려가는 기분이려나, 그림도 본인 작품이고 시간도 본인 시간이다. 작품과 시간 모두 본인이 컨트롤하고 책임을 진다. 손님이 오면 밑그림에 색을 입혀간다. 매번 인사도 똑같고 이용 안내 멘트도 똑같지만, 다양한 손님들을 만나니 다양한 색깔들이 입혀진다. 퇴근할 땐 그날의 그림이 완성된다.
물론, 누군가가 틀을 정해주지 않고 가이드를 주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건 굉장히 불안한 일일 것이다. 미술 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나는 학교 미술 시간에 "자, 자유롭게 그려보세요"라는 미션이 제일 두려웠다. 고민하다 시간만 가고 망쳐서 다시 그리다 시간만 갔다.
매일 아침 마주하는 건 어제 그리다 만 그림
회사 출근길이 항상 무거운 건 매일 들고 출퇴근하는 노트북 때문만은 아닐 거다(퇴근 이후에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타인의 메일과 나의 불안증이 더해지면서 매일 노트북을 들고 출퇴근한다). 내 책상 위에는 하얀 도화지가 아닌 어제 그리다 만 도화지가 있기 때문. To Do List는 계속 쌓이고, 대개는 업무 시간 내에 마무리하지 못한다. 다 털어버렸다 싶었는데 일주일 내내 도돌이표로 돌아가기도 하고 내 도화지에 남들이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지난번 그 보고서 좀 다시 보내 주세요. 방향을 좀 바꿔야겠어요."
"부사장님께 보고했더니 내용 더 심화해서 대표님한테 보고하라 하네요."
"그때 그거 무사히 통과된 줄 알았는데 이슈가 터졌어요."
하아, 그리고 대부분의 상사는 ASAP를 요구한다. 나도 못 쓰는 내 시간을 그들이 사용하는 건 참 쉽다. 메일 한 줄이면 된다.
"오늘 퇴근 전까지 부탁합니다."
네네. 그럽지요. "그들의 퇴근 전"까지 응해드리고, "그들의 퇴근 후"에는 내가 ASAP라고 생각했던 진짜 내 일을 한다. 그리고 그날의 마감 작업은 없다. 그리다 만 그림을 놓고 퇴근한다.
남편은 매일이 똑같은 하루살이지만,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다. 나 역시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는 하루살이인데, 날마다 묵은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다.
남들이 정해준 일을 그들이 정해준 시간까지 해야 하니 그런 건가? 나도 딱 한 줄의 메일로, 나 자신에게 오늘 퇴근 전까지 이 업무를 부탁한다고 한 번만 말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