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만화카페 사장이 된 이후 오전 10시 이후부터 공식적인 하루를 시작한다. 내가 출근하거나 바쁜 재택 근무일에는 잠깐 일어나서 아이들 아침을 챙겨주고 등교 준비를 돕기는 하지만, 이내 이불 동굴 속으로 다시 쏙 들어가니 공식적인 기상은 아닌 거다.
"부럽다."
출근 준비를 할 때 누워 있는 남편을 보며 중얼거린다. 저렇게 한없이 늘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14년 동안 어떻게 지각 한번 없이 따박따박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산 거지? 신기하기도 했다.
더 신기한 건 저 큰 몸이 미동도 없이 하나의 자세 그대로 몇 시간도 있을 수 있다는 거다. 아니면 나무늘보처럼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는 있는데 성질 급한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걸 수도 있겠다.
주말에는 남편의 출근 준비를 풀 버전으로 구경할 수 있는 찬스가 생기는데, 나무늘보처럼 누워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스피드가 생긴다.
동굴이었던 이불을 후딱 개어두고, 욕실로 퀵하게 간다. 10분 후 샤워와 양치를 마치고 나오면 옷 입는 데까지 5분이면 된다. 15분 컷이다. 직장인 시절의 일사불란함을 금세 되찾는다. 마치 여러 개의 행동 모드를 돌려가며 필요한 걸 클릭하고 미션 클리어하는 느낌이다.
주말에도 꼬박꼬박 출근하는 건 안타깝지만, 일생일대의 꿈이라 했으니 본인이 아쉽지 않다면 괜찮은 거다. 그리고 땜빵 알바 당첨일에는 나도 주말에 함께 출근해주니 더 괜찮지 아니한가. 내 속은 터지지만.
내 입에서 무려 "낭만"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가끔은 둘이 산책 삼아 걸어서 가게에 나가기로 한다. 그저 느긋하게 걷다 보면 안온한 오전 풍경을 만나게 된다. 꽃집 앞을 지나며 마음을 알록달록 물들이다가도 강아지들이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꼬랑지에 시선을 빼앗긴다. 이제 막 진열을 시작한 과일가게 사장님의 콧노래가 길 위에 뿌려진다. 자전거 따릉 소리에 따스한 햇살까지 더해지면 어느새 출근길은 황홀한 힐링 길이 된다.
"사람은 없고 강아지 반, 자전거 반이야, 그치?"
남편이 배시시 웃으며 묻는다.
19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출근길에서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을까? 전철역까지는 아슬아슬 열차 시간표 맞추느라 단거리 육상 선수가 되고, 지하철에 올라타는 순간부터는 숨이 막혀 데드 포인트가 와도 견뎌야 하는 장거리 육상 선수가 된다. 너무 지옥 같아서 황홀할 지경이네.
지옥철과 한가로운 동네 풍경을 단순 비교하는 게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옥철을 더 지옥이라 느끼는 건 내 마음이 지옥이라 그런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출근길에 오감을 활짝 열고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건, 이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운 좋게 전철에 앉아도, 혹은 선 상태에서 밤 사이 들어온 메일은 없었는지, 상사가 관련해서 질문하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하차역을 지나치기도 하는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어제 퇴근 전 상신한 보고서에 오타는 없었는지 또 확인하고 회의 때 어버버 댈까 불안해 자꾸만 자료를 들춰보다 황급히 짐을 챙겨 내리는 내 모습이 아른거린다. 무의식에 가까운 스킬로 출근을 준비하고 아직 책상 앞에 앉지도 않았는데 회사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오전 햇살이 그토록 찬란한지도 모른 채 점심을 먹고, 해가 졌는지도 모르고 퇴근을 한다.
내 하루 중에 나는 어디 있지? 내 시간은 어디로 숨은 걸까? 내 눈은 꽃집은커녕 모니터 화면만 뚫어지게 보고 있고, 산책하는 강아지들의 꼬랑지는커녕 우리 집 강아지 생각할 시간도 없다. 청명한 따릉 소리 대신 상사의 지시와 일에 파묻힌 동료의 곡소리만 들린다. 내 눈썹 한쪽이 흐릿하게 그려졌다는 것도 점심 먹고 양치할 때에야 알아챈다.
퇴근 후에도 쉴 새 없이 메일과 채팅은 쏟아지니, 꼭꼭 숨은 내 시간은 밤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 어릴 적 밖에서 숨바꼭질하다가 내가 못 찾으니 말도 없이 자기 집으로 가버린 친구처럼, 시간도 내가 안 찾아주니 제 집으로 가버렸나 보다.
남편도 그렇게 14년을 보내다 이렇게 한가롭다 못해 느려 터진 출근길을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무늘보에게 찰떡같은 라이프 스타일을 만나 행복하다고 느꼈으려나?
남편의 강아지 반, 자전거 반 질문에 대답한다.
"좋으네. 낭만적이기도 하고"
평일 회사와 혼연일체로 일하고 주말에 쉬지도 못한 채 땜빵 알바를 나가면서 성질을 내도 모자랄 판에 낭만 타령이라니. 나도 한참 모자란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