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9to6로 일하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비록 야근한 날이 칼퇴한 날보다 훨씬 많기는 하지만 야근에 대해 하소연하려면 별도의 주제로 글을 써야 할 거다.
나만 기억하는 사실이지만, 이는 "은밀하고 합법적인 이중생활" 연재 글의 첫 번째 줄에 자리한 문장이다("사모님이 주말 알바를 해줘야겠어" 편). 그리고 이제부터 그 문장에 대해 설명을 하고자 한다. 나는 왜 야근한 날이 칼퇴한 날보다 훨씬 많았을까. 그리고 왜 하소연을 하고 싶은 것일까.
9to6의 평범한 회사원이라면서 9to6를 지키지 못한다는 건 평범하지 않다는 거고, 이는 내가 갖고 있는 몇 가지 쓸 데 없는 습관들에서 비롯되었다.
회사에서 쓸 데 없는 첫 번째 습관은 "네 해보겠습니다"라는 대답이었다. "해보겠다"는 건 자신 없는데 혹은 내 일도 아닌데 굳이 내 시간을 써서 유의미한 무언가를 만들어보겠다는 거였다.
덕분에 사무용 다이어리에는 해야 할 일 아니 해보겠다고 한 일이 덕지덕지 적혀있다. 하나라도 끝맺음을 하기 위해 붙잡고 늘어지다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불안한 마음에 노트북을 열어서 일했다. 하지만 하나를 해내면 또 하나를 요구하고 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일이 또 생기니, 결국 월이 바뀌고 계절이 지나도 마침표 하나 없는 네버엔딩 다이어리가 되었다.
처음엔 내가 능력 없음을 탓했다. 새로운 일은 매번 어버버 대고, 특별한 기술도 없으며 시간 관리마저 잘 못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다 슬슬 성질이 나기 시작했다. 비정기 보고 건. 상사는 금요일 저녁에 수정을 요청한다. 본인은 일요일에도 회사에 출근하니 주말에 보완해서 줘도 좋다 한다.
그냥 주말에 해달라고 말을 해 이 사람아!
고로, 꼭 내가 무능한 탓은 아니었다. 해보겠다는 습관성 멘트를 남발했기 때문이었고, 남들에게는 해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였다.
두 번째 습관은 퇴근 이후 받은 메일을 일일이 확인하고 성심껏 답신을 한다는 거다. 분명히 퇴근하겠다고 말하고 나왔는데 마음은 회사에 두고 오는 것이다.
가엾게도 관리자나 임원들의 대부분은 빨리병, 즉시병에 걸려 있고, 긴급 처방약을 구하기 위해 퇴근 후에도 메일을 보낸다. 너무 감사하게도 바로 회신을 달라는 건 아니다. 그저 "매우 미안하지만" 아침 9시에 출근하자마자 자료를 보내주면 된다고 한다.
진짜 감사하긴 한데 진짜 화가 나기도 하는 오묘한 기분이 든다. 아침 9시에 보내주려면 지금부터 자료를 보고 정리해야 하는 거다. 시계를 보니 저녁 6시 반이고 나는 퇴근 전철 안에 있다.천만다행으로 매일 노트북을 들고 퇴근한다. 집에 가서 노트북을 켠다.
그냥 야근을 하라고 해 이 사람아!
퇴근 후 성실히 대답해주는 쓸 데 없는 습관 때문에 누구도 야근하라 말을 안 했는데 자진해서 야근하는 꼴이 되었다.
세 번째는 즉시 시간을 빌려주는 습관이다.
"빨리 되겠어요?"
"네. 바로 해드릴게요."
만사 제쳐두고 그들이 갑자기 요청한 일부터 처리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 내 시간을 빌려놓고는 안 갚는다. 남편만화카페에서도 안 해주는 외상을 회사에서 해주고 있네. 오늘은 밀린 외상값 좀 받아봐야겠다.
"이 건은 이렇게 조치하려 합니다. 지침 내려주시면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
"지금은 바쁘니 알아서 하고 서술 보고해 주세요."
나도 바빠요. 지금 급하다고요. 내가 알아서 해놓으면 나중에 딴 소리 할 거잖아요.
그래서 빌려간 내 시간은 안 갚겠다는 거냐..요?
시간을 빌려주고 빵꾸나버린 내 시간을 6시 이후에 메우느라 퇴근하지 못한다.
이런 쓸 데 없는 습관들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겼고 똘똘 뭉쳐 나를 야근병 환자로 만들었다. 야근만으로는 해낼 수 없으니 주말 근무병 마저 생겼고, 거기에서 멈췄어야 했는데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병까지 생겼다.
그다음에는 사방팔방에서 다양한 병들이 찾아왔다. 힘들어도 견뎌야 한다는 존버병과 매번 최선을 다해 100% 이상을 노력하는 성실병, 주말에 노트북을 안 보면 심장이 떨리는 불안증,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증 마저 자리 잡았다.
얘네들이 찾아온 순서는 모르겠다. 공간에 맞게 모양을 돌려가며 착착 채우고 쭉쭉 비워나가며 차근차근 다음 스테이지로 올라갔더니, 갑자기 레벨 업이 되면서 자음과 모음 모양들이 무자비한 속도로 내려와 결국 엉망진창으로 탑을 쌓고 끝나버리는 테트리스 게임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Game Over.
번아웃이 왔다.
쉬지 못한 뇌, 쉬지 못한 몸이 결국 나를 제일 힘들게 한 것이다. 타인의 인정과 만족을 생각하다 나를 잊었다.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과 안 하면 내 자리가 소멸된다는 위기감만 있었다. 끊임없이 To Do List를 누더기처럼 붙였다. 미래의 나만 쫓다 보니 현재 나와의 균형이 깨져버렸다.
야! 너! 아니, 나!
더 이상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번아웃이 왔음을 알아챈 건 아이러니하게도 업무가 소강상태를 보이면서 이제 좀 숨통이 트이겠다고 생각했던 시기였다. 조금이나마 업무 부담이 줄었으니 주말에 굳이 노트북을 안 열어도 되고, 평일 저녁에 나를 찾는 메일이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휴일의 나는 집에 누워만 있었다. 회사일 바쁜 거 끝나면 해야지 라며 미뤄 놓은 일들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밥 먹기도 귀찮고 치우기도 귀찮았다. 설거지는 쌓아두었고 빨래도 마찬가지였다. 침대 위에서 충동적으로 옷만 사고 정리해두지도 않았다. 처음엔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해 몸이 움츠러든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땜빵 알바로 매장에 나가야 하는 주말에는 싸늘한 내 표정에 아침부터 집안에 냉기가 돌았다. 가게에 나가도 실수 투성이었고, 상냥하고 친절한 표정도 사라졌다. 역시 겨울이라 다 귀찮아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기엔 도가 지나친 귀차니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텐션이 무질서하게 요동침을 느꼈다. 심호흡과 물 한잔이 절실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고 침까지 과다 분비되며 입속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마스크 안쪽으로 침이 쏟아지는 느낌이었지만 제어도 안되고 상황을 벗어날 수 없으니 처참한 심경이었다.
몸은 이전부터 "그만 멈춰"라고 이상 신호를 보냈지만 마음은 "대수롭지 않다"며 무시해왔다. 그러자 몸은 더 큰 아우성을 치며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화가 난 몸이 나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왜 화가 났냐고 물으니 "회사에 영혼을 갈아 넣은 게 잘못"이라 했다.
"영혼을 갈아 넣었는데 왜 네가 화를 내냐"라고 다시 물었다.
"영혼은 다 소진되어 화낼 힘도 없다고, 그러니 이제라도 내 영혼(=마음)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회사원이었고, 아이들 엄마였다. 그리고 만화카페 땜빵 알바였다. 안 그래도 힘든 사람이 만화카페 알바까지 하고 있었으니 이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생각했다. 남편이 원망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