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도 봄이 올 거라고 기대할 무렵, 직속 상사 A는 지난해 성과를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딱히 한일이 없네요"
역시, 연기대상에서 상을 받으려면 하반기 편성 드라마에 나왔어야 했어. 4명의 상사 덕분에 2020년 상반기에는 6개월 동안 2시간 쉰 게 휴가의 전부였다. 하지만 겨울부터 무기력에 빠져 한숨만 쉬고 있던 게 들켜버렸나보다.
내 탓을 하다가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내 업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직속 상사에게 이런 평가를 받는 일은 마음을 들짐승처럼 날뛰게 했다.
날마다 술을 먹으며 남편에게 회사 욕만해댔다. 내년에는 그 입에서 그딴 말 나오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이를 갈기도 했지만, 번번이 무너졌다. 도마뱀 꼬리처럼 자꾸만 자라나는 무기력에 분노의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울분 숲을이루었고 일에는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가슴만 쳐댈 뿐이었다.
퇴근 후에도 종종 만화카페에 나갔다. 코 앞에 놓인 단순 작업들이 묘한 테라피가 되어 조금씩 울분을 씻어주었다. 후딱후딱 음료수를 만들었고, 후딱후딱 설거지를 했다. 주문이 밀려도 그 순간에만 집중하면 하나씩 끝맺음이 있었다. 테트리스처럼 쌓였다가 한 줄씩 무너뜨리는 쾌감마저 느껴졌다.
상사의 평가도 없었다. 내가 친절하게 서비스를 하면 친절한 감사 인사가 되돌아왔다. 셀프서비스 매장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정리를 안 해두고 나가버리는 손님 때문에 머리에서 스팀이 나기도 했지만, 그거 치우는 데는 고작 30초도 안 걸렸다. 끝이 안나는 회사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해도 무용지물이 되거나 엉뚱한 방향의 지침 때문에 개고생 한 나에게 딱히 한 일 없이 왜 개고생만 했냐고 말하는 이도 없었다.
틈이 나면 책을 읽거나 테트리스를 하며 계속 무언가를 했다. 여기저기 먼지도 쓸고 닦았다.
날씨는 점점 더 따뜻해졌고, 집에서도 나는 이불속에만 있지 않았다. 호기심에 시작한 요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집안 일도 다시 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포기하고 나를 살리겠다는 결심
그리고 내가 1년 중 가장 사랑하는 5월이 왔다.
그리고 회사에서는대형 4중 충돌사고가 났다.
5월 초 업무를 새롭게 배정받아 정신없는 와중에, 상사 4명 모두 금요일까지 그들 각자가 지시한 일을 마무리해 달라고 했다.
전임자는 직속 상사인 A 였는데, 일의 중요도와 비중이 커져서 전담 실무자가필요했고 마침 아무 일이나 넘기기에 딱 좋은 나로 교체된 터였다. 예상대로 그는 제대로 된 인수인계를 해주지 않아 업무 적응에도 피땀 눈물이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나머지 3명은 기존 일들을 계속 같은 패턴으로 시켰고, 심지어 더 얹기도 했다.
A에게 상황 정리를 요청했지만 제 살길 찾느라 바쁜 그가 발 벗고 나서 줄 리 만무했다. 그만둘까 하다가도 당장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니 버텨보는 게 낫지 싶었다. 하지만 업무 지시 충돌 사고는 8월까지도 이어졌고, 3달 동안 남편에게 회사 욕만 해댔다.
성과 목표 중간 점검일, 이번에도 평가자는 직속 상사인 A였다.
"에휴 업무 목표가 정신이 없네요. 업무 정리 다시 하세요."
정신이 없는 건 충돌 난 지시들이 뒤죽박죽 엉켜버리면서 나도 덩달아 표류하고 있던 탓이다. 이 팀에 올 때부터 깍두기였으니 태생부터 불분명한 정체성의 업무들이 많았다.
다른 지적이 이어졌다.
상사 : 이 업무는 성과 목표에서 빼시고요.
나 : 리소스를 들여서 하는 제 업무인데요.
상사 : 별로 할 것도 없지 않나요?
아무도 안 했던 일을 내 시간 들여서 정리하고 있는데, 할 것이 없다 한다.
다시 피가 거꾸로 솟았다. 5월부터 새로 시작한 업무 곳곳에는 구멍이 있었고 구멍 중 일부는 전임자인 너, 그니까 A가 챙기지 않은 탓도 있었다.
이봐요! 나 지금 당신이 쌓아 둔 그 쓰레기 치우고 있다고요!
마음의 소리로만 외치며 쿵쿵 발을 굴러 댈 뿐이었다. 그는 계속 잔소리를 해댔지만 내 귀에는 내 발구름 소리만이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저 사람은 제 입으로 헛소리를 해대는데, 나는 내 입으로 사실조차 말하지 못하다니 서글퍼졌다. 그는 말대꾸 없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직원을 원했고, 나는 묵묵히 그를 빛내줘야 했다.
그날 저녁.
"그만둬야겠어."
"그래. 그동안 고생했어."
남편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우린 퇴사 결심 축하 파티를 열었다.
이직 이력서가 아닌 졸업 일기
언제 그만둘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퇴사는 곧 회사 졸업을 의미했다.
결론부터 말하면이직은 못한다.아래 이유들의 교집합과 합집합, 여집합까지 조합해 자가 진단해본 결과, "아쉽게도 금번 전형에서는 함께 하지 못하게 쏼라쏼라~"아, 그냥 땡이라고 말해줘. 속 시원하게!
1. 나이가 40이 넘었다.
2. 경력이 중구난방이다.
3. 관리자 경력 없는 실무자다.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한다며 당당하게 사직서를 날리는 시나리오는 박박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나간다면 도망자, 포기러, 빤스런, 중도하차녀..실패자와관련된 온갖 수식어로 스스로를 낙인 찍을 것 같았다.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야 해
중요한 건 직업을 찾는 일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 였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적어봤다.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는 용기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배짱
도전하고 맞짱 뜰 수 있는 자신감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인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자기 신뢰
아, 많다 많아. 내일 당장 그만둘 수는 없겠구나. 3달은 너무 짧고 1년은 너무 길은데, 6개월 후면 되려나? 그렇게 퇴사 시기를 정했다.
동기부여 영상이나 글부터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 부담스러웠다. 규칙을 정해서 꼬박꼬박 지키는 습관은 또 다른 강박을 낳을 것 같아 애초에 탈락시켰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 습관을 복붙해서 내 것인 양 실천하는 것 역시 싫었다. 꼭 성공해야 하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렵게 결정한 인생 2막이니만큼 진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감이 안 잡혔다. 일단 내 기분, 생각, 정체부터 파보기로 하고 규칙도 계획도 없는 졸업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첫 문장은,
"저, 수재라서 조기 졸업해요!"
졸업 준비를 마치고 내년 봄이 되면 떠날 거다. 벚꽃엔딩 노래가 들리기 시작할 즈음 난 회사엔딩. 회사는 영원히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