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기간의 업무태도에 대한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이직처를 정해두고 그곳과 입사일을 조율한 후 현 회사에 통보했던 이전 패턴들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인 데다 6개월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간을 회사에서 버텨내기로 했기 때문에 배 째라 식의 말년 병장 놀이를 할 수만은 없었다.
*군대는 "푸른 거탑"으로만 배워서 말년 병장은 그저 누워서 드래곤볼이나 던지는 걸로 알고 있어요. 군필 또는 현역 여러 분들 혹 마음이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어찌 되었던 올해 사업계획 마무리는 해야 하고, 운영 업무도 기존 루틴대로 해야 한다. 이슈가 생기면 평소와 다름없이 해결하고, 상사들의 즉시 회신 요청 메일에도 답을 해줘야 한다. 월 정기 보고도 아직 6번이나 남았다. 눈물을 쏟아내고 몸부림치며 힘들게 퇴사를 결심했는데 너무나도 그대로다.
나 혼자 남은 날짜를 세어가며 남몰래 졸업 일기를 쓰고 있는 상황이니, 또 하나의 "은밀하고 합법적인 이중생활"을 시작한 거다. 여러분!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시즌 2로 돌아왔습니다!!
업무 면에서는 티를 낼 수가 없으니 그냥 하루하루 성실하게 보내기로 했다. 싫다 싫다 생각하면 더 싫고 싫어져서 남은 날들이 괴로울 것 같기도 했다. 세속적인 순리대로 하자. 그 기간 역시 월급은 나오니까 농땡이 피지 않고 일하는 걸로 마음을 다잡았다.
대신 소소한 원칙을 세워나갔다. 핵심은 "9to6".
그동안 9to6를 못한 건 나의 쓸데없는 습관들에서 비롯되었으니 이들부터 고쳐나가기로 했다.
"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퇴근 이후에 메일에 성심껏 답하는 것
내 시간을 즉시 빌려주는 것
1. 해보겠지만 업무 시간 중에만 해보기
휴차를 내기 며칠 전부터 휴가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상대방이 기억하던 안 하던 나는 메일에 증거를 남긴다. 뻔뻔해지기로 한다. 휴가를 사수하기 위해 시간도 내가 정해 본다. 예를 들면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다.
"이날은 휴가라서 대응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이전까지 초안을 드리고 다녀와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또한 해보는 거니까 그냥 해보는 걸로 했다. 열심히 완벽하게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뱉은 말대로 하면 될 거다. 더군다나 상사의 지침 중에는 별 고민 없이 즉흥적으로 생각이 나서 "한번 해봐"라는 식도 있고, 관리자니까 한 번씩 "존재 증명용"으로 쨉을 날리기 위한 목적도 있으며,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 부서에 "딴지를 거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도 많다. 그러니 나도 그냥 해보면 된다. 업무 시간 내에.
2. 퇴근길에 핸드폰으로 메일 확인하지 않기
이건 그냥 의식적으로 안 하면 되었다. 메신저 알람도 꺼버렸다. 처음엔 불안했지만 6시 이전에 지침을 주지 않은 당신들이 시간관리를 잘 못한 거라고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아직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대로 몇 달만 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을 붙잡지 못하는 한, 일과 이슈는 계속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인정해버리자. 내가 퇴근한 시간 이후에도 지구는 돌아가고 재화와 서비스는 계속 이동하고 있으니 할 일은 계속 탄생하는 거다. 어찌 보면 우리 삶 자체가 네버엔딩일 수도 있지 않나. 점심밥을 먹고 돌아서자마자 금방 또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삶이니. 그러니 스스로 멈추어야 한다. 퇴근 시간과 함께. 주말에는 물론이고.
3. 내 시간 즉시 빌려주지 않기
사실 이게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갑작스럽더라도 업무 시간 중에 요청하면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질문에는 즉시 응하되, 자료 작성 등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좀 더 버텨보고 있다. 기존에는 만사 제쳐두고 30분 내에 회신을 했다면 이제는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한 후에 회신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들은 내가 이중생활을 시작한 줄 모르니 하던 대로 중간중간 내 자리로 와서 언제 되냐고 재촉한다.
아직까지는 뾰족한 해결법이 없어 우회하는 방법을 선택 중이다. 그런 지침이 오면 노트북을 들고 빈 회의실이나 휴게 공간으로 이동해서 일을 한다. 일단 답답한 책상 위가 아니라서 좋다. 혼자 있으니 육성으로 욕도 할 수 있고, 창문 밖 풍경을 보며 머리를 정화할 수도 있다. 내 자리엔 내가 없으니 상사가 와서 독촉할 수 없고, 노트북을 들고 어디론가 가버렸으니 급히 회의라도 간 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단기전에는 통할만 한 전략인 것 같다.
물론, 실천이 쉽지만은 않다. 자꾸만 삐걱대고 주춤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1등으로 퇴근했으니 목표 달성이다. 이 말을 할 때마다 그야말로유쾌상쾌통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