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지만 황홀한 마무리

슬기로운 졸업 생활 2

by 소소라미

은밀하게 퇴사를 준비하며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은 어디까지 발을 담그고 적절한 시기에 빼야 할 것인가를 가늠하는 일이었다.


책임과 관망, 수용과 거절 사이에서 나도 납득하고 동료에게 폐가 되지 않는 적정선을 지켜야 하는데 하루에도 12번씩 마음이 떴다 가라앉았다 했다. 공중부양하려는 정신을 겨우 붙들고 내려왔다 싶으면 다시 붕하고 올라가 버리는 것이 꼭 바이킹을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은 더 피곤하고 피로하다. 힘을 빼고 살아보려고 회사를 그만두는 마당에 퇴사를 잘하기 위해 힘을 주는 건 더더욱 싫고.


여행자의 마음으로


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오는 길에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남은 기간은 그냥 혼자 장기 여행을 왔다고 생각해버릴까. 여행이니 굳이 잘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건 그냥 경험일 뿐이다.


개고생이 되었던 허탕이 되었던 여행에 점수는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강도를 당하는 게 아닌 이상 그냥 운이 안 좋았네. 정도로 생각하고 다시는 그런 곳 또는 일정으로 여행을 안 가면 된다. 집이라는 아늑한 쉼터가 있으니 돌아가서 충분히 쉬어주면 될 거다.


매일매일 일정표는 무리하게 짜지 않는다. 다음날 일정을 위해 밤에는 충분히 휴식한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순전히 나를 위해 계획하고 행하는 것이니,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동료들 역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 무리한 부탁을 들어줄 필요는 없다. 함께 있는 동안 즐겁게 지내다 회사 기차에서 먼저 내릴 때 행복을 빌어주면 될 것이다.


마음의 짐을 비운 채 그저 내가 선택한 여행지이니 사소해도 의미 있는 것을 좀 더 경험해볼까 한다. 완전 최악의 여행 속에서도 최소한의 설렘과 배움은 있었으니.


거꾸로 시간 계산법


홈 요가를 하고 있다. 유튜브를 주로 이용하는데 랜선 요가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버텨내셨다가"이다. 부들부들 손도 발도 팔도 다리도 다 떨려 미치겠는데 매번 버티란다. 고작해야 한 동작에 5초 ~ 10초 정도일 텐데 시간이 멈춘 느낌이다. 엉겁의 시간이다.


더 이상 회사 업무나 관계에 애쓰지 않기로 했지만 남은 수개월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다. 자꾸만 뛰쳐나가는 마음을 붙잡아오고, 하기 싫은 일도 지속해야 하며, 오후 4시면 찾아오는 졸음과도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러니 매일매일을 "버텨내셨다가" 퇴근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특가 항공권을 잡겠다고 2월부터 여름휴가행 비행기를 예약한 적이 있다. 우리 가족 4명의 후쿠오카행 항공권을 30만원 대에 득템 했는데, 날짜는 무려 9월이었다.


7개월이나 남아서 그런가 딱히 설레지도 않았다. 항공권을 저가에 겟했다는 뿌듯함이 더 컸던 것 같다.


5월쯤 되자 주변에서 하나둘 휴가를 떠났고, 나도 덩달아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하지만 여전히 휴가까지는 4개월이나 남아 있어 슬슬 기다림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문득, 나 4개월 전에는 뭐했지? 지난 4개월은 어떻게 보냈지? 4개월 정도면 금방 가는 시간인가? 생각이 들었다.


1월이었으니 휴가 계획도 없었을 테고, 겨울방학 때라 아이들이랑 키즈 카페 간 게 다였다. 2월에는 항공권 예약을 했고, 가족행사들이 많아 금방 간 느낌. 봄이 되고 당시 저학년이었던 아이들 신학기 준비하고 학부모 행사를 다니느라 3월을 정신 쏙 빠지게 보냈고 4월은 회사가 바빴다. 그렇게 5월이 된 거고 그렇게 흘러간 4개월 동안 지겹다는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5월에는 9월이 꽤나 가까이 다가오고 사람들도 휴가로 들뜨기 시작하니까 남은 시간이 지겨워진 거였다.


그래서 시간이 지겨워질 때마다 D-day를 거꾸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100일이 남았으면 100일 전에는 뭐했지? 지난 100일이 지겨웠나 견딜만했나를 생각하는 거다.


퇴사까지 남은 시간 만큼의 과거 시간들을 돌이켜본다. 빡치고 화내고 술 먹고 잠 못 자는 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은 갔다. 시간이라는 놈은 참 정직하다.


그러니 얘를 믿고 남은 기간도 거꾸로 시간 계산법으로 버텨내시겠다. 다만 끝이 보이니 속은 시원하다. 졸업 일기를 쓰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일상을 더해가니 설렘도 훨씬 크다. 또 다른 장기 휴가를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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