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이 더 힘든 거였어?

본업과 부업의 가치가 역전되는 순간

by 소소라미

일하다 말고 갑자기 후~하고 깊게 숨을 내뱉는다.


주위 동료들이 알아챌까 민망한 마음도 있지만 알아채 주었으면 하는 이상스러운 마음도 있다. 마감은 다가오고 빨리 처리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마음만 급해 책상 앞을 떠날 수 없을 때 참다못해 종종 그랬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한숨이 나도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숨 쉬고 싶어 숨을 쉰 거다.


겨우 업무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더 큰 한숨이 나왔다. 인내의 끝에서 몰아쉬는 숨이었다.


휴일의 나를 동굴로 들어가게 한 번아웃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해오던 평일의 나마저 무너뜨렸다. 익숙한 수식이 걸린 엑셀 화면을 봐도 멍하니 있었고, 메일 답장 하나에도 시간이 걸렸다. 회사에서도 대자로 뻗어 누울 자리를 찾고 있었다. 번아웃의 다른 이름은 무기력이었다.


지금도 크게 바뀐 건 없지만, 2020년의 시작과 함께 기형적인 조직 구조 안에서 일을 해왔다. 일단 상사가 4명이었다.

A는 직속 상사지만 내 업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 분이 작년에 팀장으로 승진할 때 팀별 인원 정족수(팀장 포함 5명)를 채워야 해서 깍두기 신분인 내가 머리만 그 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B는 그 위의 상사였지만 나와 직접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나마 유일하게 따르는 분이었다.
C는 더 위의 상사로 부사장급인데, 숟가락 얹기를 좋아하여 여기저기 기웃대면서 우리 할 일을 찾아오라는 유형이었다. 실무자인 나에게도 직접적으로 지시했다.
D는 해외 사업부 관리자인데, 그쪽 실무자가 다 도망가버려 내 지원을 필요로 했고 본인 부하처럼 지시를 했다. B와는 동급이었고 C보다는 아래였다.


설명하기에도 복잡한 먹이사슬 구조와 각자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는 중구난방 지시들 때문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들 모두 본인의 지시가 최우선이니 먼저 해달라 했다. 일이 많아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하면 본인 것이 중요하다며 다른 일들은 교통정리를 해주겠다 했다.


머릿속 교차로에서는 매일 4중 충돌 사고가 나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호등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방향을 잃었다. 결국 교차로에서 멈춰 버렸다.


남편에게는 당분간 만화카페 땜빵 알바를 못 할 것 같다고 했다. 몸을 간신히 일으켜 회사에 기어가듯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주말까지 쉬지 못하면 더 미쳐버릴 거라 했다. 당시 만화카페는 주말 오전 타임 알바생들이 익숙해질 만하면 그만두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는데, 남편은 오후 타임으로 4시 출근하는 알바생에게 당분간 2시부터 나와줄 수 있냐고 부탁했고, 그 친구 덕에 어찌어찌 땜빵 없이도 굴러갈 수 있게 되었다.


입안에 침으로 홍수가 나는 증상부터 해결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 한의원에 다니기로 했다. 뭔가 복합적이고 심리적인 원인이 있을 것 같아 양학 대신 한의학을 찾았다.


한의사 쌤은 "일종의 번아웃으로, 몸과 마음이 안달 난 상태"라고 했다. 정신과에 온 거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내 이야기를 다 쏟아냈다.

나 : 확 회사를 관두고 시골에 들어가서 살까요?
쌤: 그러면 더 후회하실 거예요.
나 : 미쳐버릴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쉴 때는 누워서 인터넷 쇼핑만 하는데요.
쌤 : 돈 다 써버리세요. 그게 나아요. 월급 받은 거 본인 위해서 쓰세요.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한의원의 지리학적 특성에 힘입어 내 월급은 한의원을 오가는 길 의류 매장에 통째로 바쳐졌다.


한약을 먹고 조금 나아지는가 싶긴 했지만 여전히 침대에서는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은 더 이상 오후 타임 알바생에게 2시 출근을 부탁하기가 미안해졌다. 나에게 조심스럽게 주말에 매장에 나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화가 났다. 가긴 할 건데 화도 낼 거니까 각오하라고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의 카페 출근길이었다. 아직 2월이었지만 오전 11시의 햇살은 다시 따사로움을 내뿜기 시작했고, 광장에도 강아지 반, 자전거 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길을 걷는 나만이 성난 표정으로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였다.


손님들도 무채색 외투 대신 파스텔컬러의 옷을 입고 만화카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화를 내기로 약속했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 문득 카운터 근처 도서 진열대에 있는 에세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픈 시기에는 설거지옥에 빠져서, 손님이 많지 않던 안정 시기에는 포스기와 음료 제조를 배우느라, 암흑기(이때도 여전히 암흑기였지만)에는 만사가 귀찮아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책들이었다.


"아 맞다. 여긴 만화카페였지. 만화는 물론 에세이와 소설책도 있는!"


이후 매장에 출근하면 짬짬이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를 비롯, 위로와 힐링을 주는 에세이들을 읽어나갔다.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아, 진짜 봄이 오는 건가.


까르르까르르 10대 소녀들,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음식을 다 시켜주는 아빠들, 혼자 하루 종일 놀고먹고 만화책만 보는 찐 만화 러버들, 매장에는 여전히 활기와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다.


매장에 있는 게임기로 테트리스를 해봤다. 태어날 때부터 게임 DNA는 영 별로여서 처음엔 5판도 못 갔다. "어디 한번 해보자." 뜻 모를 오기가 나서 매장에 나올 때마다 계속했고 12판까지 가게 되었다. 도형인지 자음인지 모음인지 모를 "그것"들은 여전히 무자비한 속도로 내려왔지만 차근차근 공간을 채우고 비워갔다.


성취감에 도취되어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도 이제는 겨울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의 4중 충돌 사고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책상에서는 여전히 한숨이 나왔다. 나는 진짜 숨을 쉬기 위해 만화카페로 나왔다. 자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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