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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Sep 11. 2023

귀차니스트라는 정체성 비워내기

비움 장벽 걷어내기 1) - 게으름

비움만으로 끝은 아니었다. 막상 대상을 분류하고 나니 더 큰 산에 부딪치게 된다. 이는 비움으로 분류한 옷을 처분하는 과정이었다.


날마다 조금씩 비워나갔던 만큼 배출해야 할 옷은 매일 나왔는데, 문제는 집밖으로 배출되는 속도가 분류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비움에는 2단계가 있는데 1차는 분류, 2차는 배출이다)


그 결과 비움 대상이 늘어날수록 드레스룸 한편이나 창고 구석에는 처분을 대기하는 옷들이 쌓여 갔고, 일부는 무너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니 만큼 지나다닐 때마다 발로 차이기 일쑤였다.

비움 분류 후 드레스룸 한쪽에 쌓여 방치된 옷들

일부는 중고 거래나 나눔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막상 거래 글을 등록하거나 택배 예약을 하는 것부터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뤘다. 상자나 쇼핑백에 담아 둔 채 드레스룸 안을 굴러다니도록 놔두었다.


버리는 쪽도 나을 게 없었다. 천성이 집순이라 늘 실내복을 입고 지내며 별일 없으면 현관 밖으로는 당최 나가지를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2분 거리라 해도 헌옷 수거함까지 가는 데에는 옷 짐을 들쳐 매고 나선다는 의지에 옷을 갈아입겠다는 의지, 신발을 신겠다는 의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겠다는 의지가 연속적으로 더해져야 했다. 마음을 다잡는 것보다는 미루는 편이 쉬웠다.


"내일 하지 뭐."


내일은 또 내일이 되었다. 도대체 그 내일은 언제 오는 것인지.



MBTI 검사를 하면 늘 ISFP라는 결과가 나왔다. 귀차니스트 적인 성향이 짙어 대체로 게으른 유형이라 한다. 나는 특히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귀찮아하는데 직장 생활을 할 때도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서 키보드만 두드리는 업무를 선호했다.


집안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거지를 하자마자 빨래를 돌려야 하고 쉴 틈도 없이 청소를 하며 이방 저 방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자체가 너무 귀찮았다. 기본적인 살림도 겨우 하는 정도였으니 평소에 바지런히 집안 곳곳을 정리정돈 했을 리 만무하다.


가끔 현타가 올 때면, 나는 원래 게으른 유형이라 살림이 맞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을러서 못하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정리정돈까지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주기적으로 옷을 비우고 필요 없는 물건을 내다 버리는 과정을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의 습성이다. 내가 게으르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고 싶기 때문에 게으르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다.



하기 싫은 이유는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무감은 부담을 낳고, 부담은 회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꿔보자. 버리러 나가는 것이 아닌, 나가는 김에 버리는 것이라고.


요즘같이 날씨가 좋을 땐  같은 집순이도 바깥공기가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하늘 높고 바람도 시원한 9월이 아닌가?  날씨를 이용하면 된다.


일 년에 몇 번 오지 않는 쾌청한 날씨를 만나는 호사를 누려 보자. 겸사겸사 버릴 것도 싸들고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귀찮음을 이겨낸 스스로를 칭찬하는 마음으로 커피라도 한잔 사주면 어떨까?


오늘은 아침에 나가보기로 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날씨를 만나러  나가는 김에 버릴 물건들을 챙긴다. 손으로 들기 버겁다면 폴딩 카트에 담는다. 엘리베이터 그까짓 거 1분이면 온다. 짧은 영상 하나 보고 있으면 시간이 훅 갈 것이다.


분리수거 장을 벗어났다면 이제 폴딩 카트를 접는다. 한결 이동이 쉬워진다. 카페 문을 열자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친다. 여유로운 아침 카페의 분위기에 젖어들다보니 내면까지 우아해지는 기분이 든다. 마음은 절로 차분해지고,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낼 수 있겠다는 긍정적 에너지가 생긴다.

커피 한잔 사들고 집으로 오는 길 (해가 완전히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집 밖으로 완전히 배출하는 귀찮은 과정을 이겨낸다면, 비로소 많은 옷을 가지고 있다는 죄책감과 중압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옷장 또한 옷을 보관하는 곳이 아닌 고르는 공간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갖게 될 것이다. 내가 설레는 옷들로만 가지런히 채워진 여유 있는 옷장. 바라마지 않던 그 공간을 손에 넣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날씨를 선물 받겠다는 마음으로,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 좌충우돌 실패 투성이의 옷장 비움, 그리고 초보 미니멀리스트로의 성장기를 다룬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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