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살리기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1년 쯤 지나 1차 목표인100벌 이하를 달성했다(정확히는 80벌이니 초과 달성!). 덕분에소유한 옷들이 한눈에 들어오자,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컬러별로는 화이트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블랙, 그레이, 아이보리가 그 뒤를 이었다. 쿨톤 피부 타입에 제법 어울리는 라이트 핑크나 블루 계열도 일부 남겨졌다. 디자인은 상하의, 원피스 모두 특별한 무늬 없이 깔끔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으로 판명 났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옷들로만 구성된 옷장의 윤곽이 드러났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남은 옷들로 다양한 코디를 구상해서 나만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도서관에 가서 미니멀리즘에 기반한 코디 룩북 몇 권을 밀려왔다.
계절별로 기본 스타일의 상의 몇 벌, 하의 몇 벌을 자유롭게 조합하여 돌려 입는 방식에 눈이 갔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옷들과 디자인도 유사하고 컬러도 많이 어긋나지 않아 참고할 만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내가 비워냈던 옷들 중 일부가 상당히 유용한 아이템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특히 기장도 애매하고 골반 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화이트팬츠를 고민도 없이 비워버렸는데 코디북마다 화이트 팬츠는 기본 중에 기본이라 했다.
'가성비 좋은 놈으로 다시 사야 되나? '
내적 갈등이 증폭되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비워냈던 화이트 팬츠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쇼핑 앱은 다 삭제해 둔 터였기에 웹 검색으로 쇼핑 사이트에 들어갔다.
괜찮아 보이는 화이트 팬츠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100원이 모자라 무료 배송이 안된단다. 저렴한 티셔츠 하나를 추가하면 이득일 거라는 생각에 세일 코너로 들어갔다. 7000원짜리가 티셔츠가 마음에 들었지만 사이즈가 없었다. 그냥 오버사이즈로 입을까? 고민하다, 문득 현타가 왔다.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후딱창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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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에 들어가자 배너광고가 나왔다. 어제 그 쇼핑 사이트였다. 창을 닫아버리고 싶었지만 업무 상 인터넷 사이트 방문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배너의 x를 눌러도 그때뿐이었다. 다른 사이트를 방문하면 또 배너가 떴다.
"나 세일 중인데, 그냥 지나칠 거야?"
악마의 속삭임은 계속되었다. 귀가 간질거리면서 눈앞에 화이트 팬츠가 아른거렸다.
차라리 품절이라면 깨끗이 포기할 수 있겠지 싶어 확인 차 사이트에 들어갔다. 지난번엔 신경 쓰지도 않았던 원피스가 메인 화면에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세일 상품도 아니었다. 어느새 화이트 팬츠는 잊히고 머릿속은 온통 원피스 생각으로 가득 차버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디자인이 미니멀 스타일의 정석이었다.
며칠 후 남편과 근처에 갔다가, 해당 브랜드 매장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그 원피스가 입구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만져만 보고 나오겠노라 했다. 하지만 막상 만져 보니 입어보고 싶어졌다. 입어 보니 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원피스를 들고 카운터로 직행했다.
다음 날 드레스룸에 걸린 새 원피스는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충동적으로 옷을 사버리다니,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던 나는 짝퉁이었던가. 자존심이 상하고 죄책감도 들었다. 나를 채찍질하는 마음으로 힘들게 옷장을 비워냈는데 이렇게 쉽게 사버리다니 허무감이 밀려왔다.
[조그맣게 살 거야]의 저자는 “자제하고 욕구를 억누르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익숙했던 습관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존 본능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사지 않는 습관은 마음속 다짐만으로 쉽사리 실천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최절정기 3년, 그 이전까지 포함하면 근 10년 가까이 옷을 탐닉하던 습관은 이미 뼛속까지 깊게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든 관성에 따라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단련하는 자세로 생활 방식을 바꿔나가야 하는데 잠깐이라도 마음이 느슨해지는 사이, 악마는 어느새 귓가를 간지럽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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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 자체가 목적이 되면 당장 물건의 양은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소비의 유혹마저 뿌리치기는 어렵다. 비움과 소비를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가다 보면 하나를 비웠으니 하나를 채워도 된다는 합리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무한히 In & Out이 반복되면서 이 자체에 시간과 에너지가 사용되고, 돈도 낭비되며 환경 문제에도 떳떳하지 못할 수 있다.
그동안 물건의 양 줄이기에 심취한 나머지 내가 간과한 부분이었다. 100벌이라는 1차 목표에 집착했기에 다짜고짜 비워내기에 급급했고, 다시 사고 싶다는 부작용에 맞닥뜨린 것이다.
쓸데없는 소비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진짜 목적을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어떤 옷장을 원하는지 말이다. 내가 원하는 옷장은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올 만큼 여백이 있고, 모든 옷이 한눈에 파악되어 코디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다. 과잉이 없는 공간은 질서와 평화를 선사하고 머릿속까지 심플하게 정리해 준다. 다분히 물질의 영역이지만 정서적 문제로 연결되기에, 나는 이 공간이 다시 불안정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여유와 편안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맞닿아 있다.
해결법은 간단하다. 화이트 팬츠를 대체할 만한 것을 내 옷장에서 찾으면 된다. 눈 씻고 둘러보니 나에게는 아이보리 팬츠가 있었다.
P.S. 원피스는 그냥 입기로 했다. 솔직히 너무 예쁘긴 하다. 10년, 20년 주야장천 입어서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야 말겠다.
* 좌충우돌 실패 투성이의 옷장 비움, 그리고 초보 미니멀리스트로의 성장기를 다룬 매거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