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와 사이즈가 바뀌는 만큼 물건 배치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로운 공간으로 삶의 터전이 변화하기에 "이 기회에 깔끔한 집을 유지하고 싶다", "쾌적한 옷장을 만들고 싶다", "너저분하게 물건을 쌓아두지 않겠다" 등 새 마음으로 출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각오는 이삿 날부터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삿짐센터 직원분들이 곳곳에서 불러대는 통에 각 방의 가구 배치만으로도 에너지가 달린다. 사전 답사를 통해 미리 계획했음에도, 실전에서는 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 사이 부엌 담당 이모님은 살림 담당으로 보이는(?!) 나를 수시로 부른다. 하루종일 여기저기에서 '사모님' 소리가 동시 다발적으로 들린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전체적인 틀을 잡는 데에도 넋이 나간다. 이사가 끝난 후에는 혹 분실하거나 망가진 것은 없는지도 체크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 내에 마무리해야 하기에 옷장 안이나 드레스룸과 같은 수납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래. 살면서 정리하면 되지."
별 탈 없이 무사히 마치기만 해도 다행인 것이다.
다음 날부터는 본격 살림과의 전쟁에 돌입이다. 공간과 구조, 동선 모든 것이 낯선 데다 어디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파악되지 않아 물건 하나를 찾는 데도 한참이 걸린다.
특히 문제는 저 쪽 집 빌트인에서 이 쪽 집 빌트인으로 이사 온 아이들인데 그 대부분은 싱크대에 몰려 있다. 식기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양념통도 엉뚱한 위치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자주 사용하게 되는 싱크볼 근처 하부장엔 난데없이 술들이 들어가 있다. 밸런타인 18년 산, 로열 살롯 21년 산, 매번 고이고이 싸들고 함께 옮겨 오는 녀석들이다. 남편 말로는 시아버지가 생전에 사두신 것들이라 한다. 어림 잡아도 20년은 되었으니 이제는 밸런타인 40년 산쯤 되는 건가? 이 참에, 100년 산까지 도전? 아차차. 내가 먼저 죽겠구나.
자자, 딴생각일랑 거둬두고 짐 정리에 집중하자. 엄마가 이사할 때마다 하셨던 말을 상기하면서.
"어차피 내 살림이니 내 구미에 맞게 살면서 정리해 나가야 해."
그 말이 백번 천 번 맞다. 이삿짐센터 분들이 내 살림 취향을 어찌 알고 알아서 척척 수납을 해주겠는가.
먹는 것에 진심인 우리 가족의 먹고사니즘을 위해 '주방' 정리가 우선이다. 드레스룸과 옷장은 아침저녁에만 잠깐씩 마주하는 곳이니 얼마간은 나 몰라라 해두어도 괜찮다. 중요하지 않다. 일단은.
이사 온 지 한 달쯤 지나면 주방 물건들도 새 보금자리에 익숙해진다. 나 역시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면서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위치를 찾아낸다. 비로소 내 집 같다.
그러나, 이제야 드레스룸과 옷장은 이삿날 그 상태 그대로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겨울 옷과 여름옷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남편옷과 내 옷의 구분조차 없다. 바지가 위에 걸려 있고 재킷이 아랫단에 자리하고 있다. 저 쪽 집에서 옷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들은 이 쪽 집에서도 널브러져 있다. 이삿짐센터 기사님들은 있던 자리 그대로 해주실 뿐이다. 애초에 널브러 뜨린 건 나지 기사님이 아니다. 원망은 거두고 각각의 옷들에게 맞는 자리를 정하기로 한다.
어디 보자. 일단 눈에 띄는 불균형 상태부터 해결해 볼까? 상의는 윗단에 하의는 아랫단에 걸려 있는 것이 눈엣 가시처럼 신경 쓰였으니 맞바꾸어보자. 아, 이런. 키가 안 닿는다. 이 집에는 엄마손같이 생긴 긴 막대기가 없네. 의자를 가지고 와야 하나? 괜히 오르락내리락하다가 허리라도 삐끗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친다. 남편이 귀가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1분이면 끝날 것이다.
남편은 오늘 말고 내일 해주면 안 되겠냐고 협상을 한다. 미리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하루쯤은 쿨하게 기다리기로 한다. 내일이 된다. 온 가족이 외식을 하기로 한 날이다. 늦게 들어왔으니 또 다음날로 미룬다. 그다음 날에는 또 아무거나 이유가 생긴다.
며칠이 지나버린다. 생각해 보니 이사하고 한 달 이상 문제없이 살았고, 이미 적응이 되어서 상의가 아래에 있어도 바지가 위에 걸려 있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옷이 많아서 옷과 옷 사이에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지만 한 손으로 잘 잡고 꺼내거나 옷걸이에 두 겹 세 겹 쌓아 놓는 것에도 익숙해지니 큰 불편은 없다. 앞으로도 문제없이 살 수 있겠다 싶어 내버려 둔다.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게 된다. 다음 이사 전날까지.
그동안 몇 번을 이사해도 옷 정리를 하지 못했던 이유다. 사람의 적응력이 이렇게나 무섭다.
평소에는 비움에 대한 개념이 없다가 이사한 후에 깨끗하게 정리하고 살면 된다는 생각은, 결론적으로는 그냥 안 하겠다는 의미와 같았다. 미래의 내가 몸을 바지런히 움직여서 다 해낼 거라는 믿음은 갖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1년 가까이 큰 에너지를 들여가며 옷 정리를 하게 된 것은 과거의 나 그리고 그 이전의 내가 미루고 미뤄온 탓이다. 이사와 상관없이 평소에 쓰임이 다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옷은 비워내고, 원칙을 정해 쇼핑을 즐겼다면 이런 수고로운 상황은 맞닥들이지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스친다. 하지만 나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계산이 안 서고, 직접 경험해 봐야 깨닫는 유형의 사람이다. 된통 당해봐야 정신을 차린다.
옷 무덤과의 사투 끝에 옷을 80벌로 줄였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한 내 옷장 (눈치 챘겠지만 화이트 티셔츠 매니아임)
*맨 위 표지 이미지는 남의 집 옷걸이입니다 (출처 : Unsplash). 제 집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