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퇴사 결심과 동시에 패션 미니멀 리스트를 선언하고 5벌의 화이트 티셔츠로만 여름을 보냈다. 하의는 단정한 리넨 스커트 두벌과 낭창낭창한 와이드 팬츠를 매치했고, 가끔은 티셔츠 위에 뷔스띠에 스타일의 원피스를 덧입었다. 필요한 옷은 티셔츠 5벌, 스커트 2벌, 팬츠 1벌, 원피스 1벌뿐이었다. 일종의 캡슐 옷장이었다.
내가 선택한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는 곳(행거에 별도로 걸어둠)을 바라볼 때마다 뿌듯했다. 컬러나 디자인도 무난하여 걸려 있는 자체로도 시각적 안정감을 주었다.
당시에 엄선한 티셔츠들
상의와 하의 아무 옷이나 골라 잡아도 제법 조화를 이루었기에 스타일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개성 있는 옷 위주의 코디에 집착한 탓에 돌려 입기가 불가능했던 지난날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개인플레이를 포기하고 나니 조직력이 살아났다고나 할까?
일주일에도 몇 박스씩 택배 상자가 날아오던 사람이 단 9벌로, 심지어 새 옷을 사지 않고 한 계절을 날 수 있다니.
나, 이렇게 미니멀리스트가 되어가는 건가? 이제 나도 "그토록 동경하던" 단출한 삶을 실천할 수 있는 거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졌다.
가을에는 가을용 캡슐 옷장을 만들었다. 바지, 맨투맨, 쭉티, 후드 집업, 점퍼 각각 2벌이면 충분했다. 이쯤 되면 나도 미니멀리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무렵부터 시작했던 비움 퍼레이드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갑자기 쌀쌀해진 11월, 문화센터 그림 교실에 가는 날이었다. 캡슐 옷장에는 없었던 코트를 꺼내 입기로 했다.평소처럼맨투맨 티에 고무줄 바지를 입고는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 보니 코트는 니트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다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니트의 종류가 다양했다. 이 공간은 평소에 눈에 담고 있지 않기에 직접 입어보지 않고는 어떤 옷이 더 어울리고 만족감을 주는지 판단이 어려웠다. 이것저것 입어보기 시작했다.
5번 정도 입고 벗고를 거듭한 후에야 한 녀석을 최종 낙점했다. 그러나 이제는 바지가 조화롭지 않아 보였다. 면바지로 갈아입었다. 이 역시 캡슐 옷장에는 없던 옷이었다.
공동 현관을 나서 자전거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바지 선택에 완전히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기장이 짧은 옷인데 페달을 구르니 무릎까지 올라갈 태세였다. 생각보다 매서운 바람은 자전거가 공기를 가를 때마다 맨다리를 강타했다. 코트를 입은 모습도 가관이었다.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멋지게 활보하는 모습을 상상했건만, 문화센터 입구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옷이 없어서 담요라도 두르고 나온 듯볼품없었다.
더욱 짜증 나는 건 옷 선택시간을 절약하겠다며 기껏 만들어놓은 캡슐 옷장에서는 정작 단 한벌도 꺼내 입지 않았다는 사실과, 옷을 고르느라 수업에 지각했다는 현실이었다.
이런 감성 터지는 느낌은 절대 절대 아니었음 (출처 : Unsplash)
유튜브에서 캡슐 옷장을 검색하면 미니멀리스트들이 만드는 정갈하고 단출한 옷장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러한 옷장들을 동경해 온 만큼,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엄선된 옷으로 옷장을 꾸몄고 많은 옷이 없어도 충분히 멋지게 입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해 본 바로 이는 미니멀리즘 흉내내기에 불과했다. 캡슐 옷장은 한정된 옷으로 다양한 코디법을 연출하는 기법 중 하나일 뿐 이 자체가 미니멀리즘의 실천이라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 아이보리, 베이지, 그레이, 블랙 등 미니멀리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뉴트럴 톤의 옷들이 늘어선 옷장은 더욱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시각은 다르기에 내 말이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인정한다. 다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의미로 다가왔음을 말해두고 싶다.
캡슐에 포함되지 않은 그 계절의 나머지 옷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상태다. 그것이 박스나 트렁크에 들어가 있던, 드레스룸에 걸려 있던 마찬가지다. 현재 내 시야에 들어오는 공간은 캡슐 옷장뿐이기에,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존재조차 잊힌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날씨에 변수가 생기거나 중요한 약속이라도 잡힌다면 캡슐 안에서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예상보다 일찍 다음 계절의 옷이 필요하거나 이전 계절의 옷을 다시 꺼내 입어야 할 상황일 것이다. 이는내가 소유한 옷들을 이미 알고 있으며 모든 옷들이 한눈에 보일 때라야 빨리 해결할 수 있다.
그날 이후 나는 캡슐 옷장에 대한 동경을 버렸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옷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데다, 날씨에 컨디션이 좌우되어서 같은 계절이라도 다양한 두께나 소재의 옷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너지 레벨도 낮고 시간 욕심도 많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좀 더 옷의 가짓수를 줄여서 4계절의 옷이 한눈에 들어오는 옷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미니멀리즘은 절대적인 물건의 양을 기준으로 판가름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이 필요로 하고 좋아하는 물건들을 제 기준에 맞게 용량을 유지하면서 관리하고 사용하면 된다. 내 삶의 기준이 나 자신이 되는 것처럼, 미니멀리즘 또한 마찬가지다. 나 자신이면 충분하다.
* 좌충우돌 실패 투성이의 옷장 비움, 그리고 초보 미니멀리스트로의 성장기를 다룬 매거진입니다. 관련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