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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Sep 05. 2023

부부싸움 일촉즉발? 남편의 옷장 비우기

현명하게 가족의 물건을 비우는 방법 (feat. 존버)

(나) "혹시, 언젠가 다시 취업할 생각 있어?"

(남편)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퇴사한 지 3년도 더 지났지만 한 번도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없었으니까."

(나) "그럼 저 어둠의 자식들(=정장) 버릴까? 미련 없이."


그날따라 남편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나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옷장 정리를 제안할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남편은 패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새 옷을 탐닉하지도 다양한 코디를 즐기지도 않으며, 자주 입는 디자인이나 컬러도 비슷비슷해서 언뜻 보면 패션 미니멀리스트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경기도) 오산이다.


언젠가부터 그의 옷장 역시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옷이야 성장할수록 사이즈가 확연히 작아지기에 수시로 비워내는 반면, 몸이 옆으로만 늘었다 줄었다 하는 어른의 경우 "의식적"으로 덜어내지 않는 한 그 수는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


남편 역시 "의식적"인 비움은커녕, 옷을 포함한 물건을 버리는 데에 꽤나 인색한 사람이었다.


옷장 안에는 오랜 기간 세탁소 옷걸이에 보관해 둔 탓에 어깨 뿔 달린 셔츠들이 즐비했고, 10년 이상 한 번도 꺼내 입지 않은 티셔츠들은 그대로 굳어져 화석이라도 될 기세였지만 주인장은 스트레스를 받지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는 듯했다.


나와 남편은 드레스룸을 나누어 쓰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부피감이 크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하는 건 남편의 정장이었다. 심지어 색깔들도 블랙, 네이비, 그레이 톤이라 안 그래도 가득 차 보이는 드레스룸 공간을 더욱 압박하는 느낌을 주었다. (이런 어둠의 자식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가족의 물건은 함부로 비우면 안 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대로 나는 남편의 옷은 건드리지 않았고(목이며 팔이며 죄다 늘어져서 걸레보다 못한 옷들을 제외한다면), 그에게 필요 없는 옷은 당장 처분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었다. 내 옷들 중에서 남기고 버릴 것을 선별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 옷을 비워내며 공간이 만들어질수록 남편의 정장들이 점점 더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그의 옷들을 볼 때면 나 혼자 애만 쓰고 있는 것 같아 절로 힘이 빠졌다.



다행히도 남편은 흔쾌히 옷을 비워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세상만사 모두가 비극이라는 말대로, 그 과정은 흡사 전쟁과도 같았으니.

그는 비움 쪽으로 분류했다가도 아깝다면서 다시 거두기를 반복했다.


(남편) "언젠가 다시 입을지도 모르는데..."

(나) "지금까지 그 언젠가가 온 적이 있어?"

(남편) "앞으로는 또 다를 수 있으니까."

(나) "내 인생에는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버려. 이미 죽은 거라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틈을 주면 다시 옷걸이에 걸려 원래 자리로 돌아갈까 두려웠던 나는, 단호하고 잔인하게 죽음이라 말했다. 남편은 처음엔 반박하려 했지만 점점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단 드레스룸 안이 너무 더운 데다 이미 판이 벌어졌으니 차마 이제 와서 "그냥 다 끌어안고 살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나 보다. 비장한 나의 표정도 한몫했겠지.


사실 나도 한 때 너무나 많은 옷을 소유했던 사람으로서, 무작정 밀어붙이는 건 미안했기에 남편이 좀 더 반발했다면 깨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결혼 17년 차가 아닌가? 수많은 부부싸움을 통해 싸우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우리는 이날 기어이 싸우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눈치 게임으로 수위만 잘 조절하면 절대 싸울 일이 없다.


결국 남편은 디자인이 너무 귀여워서 차마 입을 수 없는 후드티와 작별했으며(30대 이후에 입은 적은 없음), 무릎이 30cm는 발사할 것 같은 스웨트 팬츠도 버렸다.


특히 정장은 1벌만 남기고 싹 다 치웠는데, 이 어둠의 자식들이 없어진 덕에 드레스룸이 한결 환해진 느낌이었다.


다만, 바닥에 전리품처럼 남아 있는 옷들을 완전히 이 집에서 탈출시키는 작업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남편이 옷만 비워주면 후처리는 내가 해주겠노라며 밑지는 Deal을 해버린 결과다. (역시 남편은 자기 손 안 대고 코 풀기 대마왕이다)

    그날 작업이 끝난 후 전리품들 (아, 언제 다 치우냐?)

그날 저녁 남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왜 비우기로 결심한 거야?"

"당신이 비워낸 공간을 보니까 훨씬 깔끔하고 정리된 기분이 들더라고. 뭔가 이게 더 좋아 보였어."


아, 이래서 전문가 선배님들이 "가족의 물건을 함부로 처분하지도, 버리라고 강요하지도 말고 묵묵히 내 물건을 비우면서 때를 기다려라"라고 했던 거구나!"


결과를 얻으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하며, 이 모든 것은 인내심 싸움이다. 인생도, 부부 관계도. 변화된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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