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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Aug 26. 2023

설레지만 쓸모를 다한 옷이라면?

옷 비움 기준 2 : 현재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가?

지난해 여름 퇴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슬랙스 3총사는 교복과 같은 존재였다.  


컬러는 기본 중의 기본인 블랙, 두루두루 어울리는 베이지, 상큼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민트 컬러로, 웬만한 상의들과도 매치가 좋은 효자템들이었다.(나는 이들 각각을 보다 친근하게 "깜장, 똥, 초록"이라고 부른다.)  

나의 심심풀이 캡슐 옷장 (2021년)

보드랍고 가벼운 소재는 촉감적으로도 우수했으며, 기장을 수선하지 않아도 되는 적정한 길이도 만족스러웠다. 허리 뒤쪽이 밴딩 처리 되어 있어 다른 정장 바지들에 비해 소화 기관의 부담까지 덜어주었다.


'이런 바지들은 평생 동안 만나기 힘들지도 몰라. 난 정말 운이 좋은 거야.


모두 갖춰지자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른 듯 든든했다.  



하지만 약 1년 전에 회사를 그만둔 이후, 이들 3 총사는 옷장에서 나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뭐야. 인생 바지라더니 그 새 애정이 식어 버린 것인가요?"


단연코 아니다. 여전히 이 옷들을 만질 때마다 촤르르한 느낌에 매료되고 기분이 좋다. 두루두루 매치가 쉬워서 다양한 코디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 기특한 녀석들인 만큼 애정 어린 시선은 여전하다. 기본 중의 기본템으로써 그 역할에 충실했던 이 녀석들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 정도니까.


그렇다면 꺼내 입지 않게 된 이유는 뭘까?


답은 맨 처음 문장에 나와있다.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기에 그 쓸모가 사라진 것이다.


퇴사 후에는 반년 가량의 휴식기를 가지며 소위 백수로 지냈기에 정장에 준하는 슬랙스를 입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봄에 다시 취업을 했지만 감사하게도 완전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덕분에 사무실은 집이고, 심지어 침대 옆 책상이다. (이미 상상했겠지만) 대개는 실내복 차림일 수밖에 없다(더 이상 상하지는 말아 달라. 후줄근의 강도가 상상 이상이니까). 가끔 기분 전환으로 "옷이라도 갈아입어볼까?"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라 해도 허리가 편안한 면 원피스를 고른다.


하지만 아직 설렘의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에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성심껏 회사 생활을 지탱해 준 녀석들을 함부로 비워내는 건 왠지 미안해서 비우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입을 테니 그냥 끌어안고 살까?" 싶다가도 옷장 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이들을 볼 때마다 불편하고 신경이 쓰인다. 고민하는 시간과 낭비되고 있는 공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이쯤에서 질문 하나가 휙 날아오겠지.


"언젠가 다시 회사에 출근하게 될 수도 있으니 보관해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사실, 이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박따박 출근해야 하는 회사는 더 이상 찾아보지 않을 생각이며, 그 생각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먹고사니즘이 꼭 9to6 회사일에만 달려있지는 않다는 걸 경험한 참이기 때문이다. 혹, 지금 소속된 회사가 출근 방침으로 전환된다고 해도 자유 복장이기에 슬랙스는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힘주는 느낌이 들어 부담스러울 지도 모른다.

결론은 나왔다. 슬랙스 3총사는 이미 역할을 다한 것이다. 설렘이 남아 있는 건 과거의 추억 혹은 애잔함일 뿐 냉정히 따지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미래에 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이 옷들뿐만 아니라 내가 소유한 모든 물건들에게 공간 점유권을 내줄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변해버린 라이프 스타일 상, 우선순위는 움직임이 편안한 옷, 막 구르고 뛰어도 괜찮은 옷, 어떤 상황에서도 두루두루 어울리는 범용성 있는 옷이다.


예를 들면 집 혹은 근처 카페에서 일하다가,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도 어색하지 않으면서 집 앞에서 지인을 만나면 초라하지 않은 정도면 딱 알맞다. 가끔 약속이 있긴 하지만 이 경우는 스타일이 살면서도 활동성이 편한 옷을 선호한다. 많이 먹고 많이 돌아다니려면 거슬리거나 불편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슬랙스는 이제 들어 자리가 없다.



며칠 전에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미팅이 많아져서 정장 바지가 필요한데, 남는 거 좀 있어?"

"응. 색깔별로 똑같은 거 3개 있어. 줄까?"


언니는 3벌 모두 필요하지는 않으니 2벌만 우선 빌려달라 했고, 나는 깜장과 똥색을 "영원히" 가져가라 했다. 쓸모와 설렘 사이에서 몇 달을 고민해 왔는데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니. 순간 허무하기도 했지만, 어찌 되었든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 옷들에 대한 번뇌에서 벗어나니 홀가분했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하자 해방감도 느껴졌다. 옷장 속에 처박아두고 외면할 바에야 새로운 주인에게 가서 잘 활용되는 쪽이 효용 가치도 더 클 것이다.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기에 예의를 다한 기분도 든다.


혹시나 만약 나중에 꼭 입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언니한테 빌리지 뭐. 언니는 줬다가 빼앗는 거냐며 잔소리할지도 모르겠지만.

제 역할이 끝난 물건은 과감히 버려라.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기분 좋게 해방시켜 주자.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곤도 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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