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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Aug 22. 2023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옷과는 이별을

옷 비움 기준 1 - 설렘 지수 매기기

죽일 놈의 옷장에서 탈출할 마지막 방법은 비움이었다. 다른 말로는, 옷장 다이어트라 불렸다.


쓸모없는 옷들을 우선 골라내기로 했다. 쓸모없다는 건 무얼까? 손이 가지 않아 거의 입지 않는 옷일 확률이 높다. 옷이란 몸에 착용함으로써 비로소 그 쓸모가 입증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옷에 손을 대지 않는가? 나만의 기준이라는 게 있었을까? 그날그날 기분이나 컨디션에 따라 결정했던 것일까?


도무지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배워서 익혀야 한다. 그리고 가장 빠른 길은 앞서 경험한 사람들이나 선배들의 조언을 수용하는 것이다. 수시로 도서관에 들러 한아름씩 싸들고 온 책들 속에서 찾은 해답은 "설렘"이었다.  이는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의 방법으로도 유명한데, 많은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기준이기도 했다.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는 물건은  모두 버려라"라고 단호하게 조언한다.


그렇다면 설렘은 무엇일까? 좋아하는 감정일까? 15년 이상 잠자고 있던 연애세포라도 깨워서 맛을 느껴야 하나?


이와 관련해 곤도 마리에는 "직접 만져보면 안다"라고 설명한다. 사람하고 똑같다. 눈을 마주치며 대화해 봐야 아는 것이다. 논리보다 감각적인 측면을 선호하는 나에게 적합한 방식이었다.


덕분에 옷장에서 제외해야 할 옷들을 명확히 분류할 수 있었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고작 20벌 남짓 비워낸 후 비움 퍼레이드는 일시정지 되었다. 만지면 만질수록 판단이 흐려져서 남은 옷들 모두가 아까워졌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입을 날을 올 텐데 그때 막상 옷장에 없다면 후회할 것 같아 두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우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별다른 소득 없이 흐지부지 될지도 몰라. 어설픈 결과는 요요를 낳을 수도 있고.'


설렘의 O/X로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비움은 그만큼 쉽고 간단한 일일 것이다. 특별한 각오 없이도 실천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렘은 Yes or No로 딱 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기능이나 용도를 떠나, 추억이나 기억, 서사 등 감정적인 요소가 개입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버리고 없어진 이후의 삶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니 만큼 그 기준은 미래의 내가 납득할만한 것이어야 한다. 당연히 책임이 따른다.


귀찮지만 응용 버전을 고안해 설렘의 정도를 따져보기로 했다. 별점 1~5점으로 단계를 설정하고 대략적으로 3 이하는 설렘이 적은 옷으로 분류했다.(다시 말하지만 이 작업은 정말이지 너무나 귀찮았다!). 선뜻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건 분명 단점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막상 입으려다가도 그 단점이 크게 느껴져서 다시 옷장에 처박아 두기를 반복했던 녀석들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외면받다 잊혀진 옷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중에는 최근 몇 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도 있었다. 몇 년 동안 안 입었다면 앞으로 몇 년 동안에 입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미 최애, 차애, 서드 그리고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것까지 다 정해져 있는데 과연 이 옷들에게도 옷장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질까?


대답은 NO였다.


무슨 핑계로든 안 입게 될 것이 뻔했다.


별점이 정성적인 기준이었다면, 이제 정량적인 기준 즉, 방치된 기간으로 최종 탈락자들를 확정하면 되었다. 1년은 너무 야박하고 3년은 버릴 게 얼마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2년으로 정하자. 2년 동안 안 입은 옷의 애정 지수를 "0"으로 책정했다. 설렘 별점 3점 이하의 옷들은 대부분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즉시 냉정한 사람이 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추억이 깃들어 마음이 가고, 수고롭게 구한 기억이 떠올라 함부로 내치기 아쉬웠다. 종종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이 찾아와 머뭇거리기를 반복했다. 전날 밤에 비움 박스에 던져놓은 옷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입어보고는 원래 자리에 걸어 둔 적도 있었다. 이런 옷들은 결국 한 계절을 더 보낸 이후에나 버릴 수 있었다.

설레지 않아 비워낸 옷들 1 (빙산의 일각)
설레지 않아 비워낸 옷들 2 (빙산의 일각)

사는 것은 천국이고 버리는 것은 지옥이다.  
- 옷을 사려면 우선 버려라(지비키 이쿠코)


살 때는 그저 옷을 고르고 결제하고 내 손에 들어온 순간만이 행복할 뿐, 옷장에 들어온 이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에 대한 책임은 미래의 나에게 떠넘겨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내가 현재가 되는 순간 이 고통을 오롯이 마주하게 된다. 과거의 나를 원망하기도 하고, 질책하기도 하면서.


현재의 나에게는 두 갈래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이대로 살 것인가? 변화할 것인가?


나는 변화하는 것이 나에게 맞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남은 인생은 그쪽 방향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원망스러운 과거로 남지 않기 위해 애써 "귀찮고 번거로운" 길을 걷고 있다. 이는 과거에 대한 책임이자 미래를 위한 선물이다. 미래의 내가 그때는 과거가 될 현재의 나에게 이렇게 속삭여줄 날을 기대해 본다.

옷 무덤 속에서 평생을 살지 않게 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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