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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Sep 02. 2023

내 인생이 변하듯, 인생 옷도 변한다

옷 비움 기준 3 : 입으면 편안한가?

나에게는 "인생"이라는 타이틀을 단 옷이 많았다. 인생 바지, 인생 코트, 인생 스커트, 인생 원피스 등 마음에 들고 설레는 기분을 주는 옷에는 죄다 "인생"이라는 배지를 달아주었다.


옷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 데도 계속 옷을 사는 것은 인생 옷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 합리화하면서, 인생 옷들로만 컬렉션을 완성시켜 오랜 기간 입어준다면 그간의 투자와 노력들이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였다(지금 생각하면 이런 무논리적 사고방식에 헛웃음만 납니다만).


하지만 사는 옷마다 인생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옷장 안으로 모셔졌고, 어느덧 옷 장 속에는 인생들이 한가득 모이게 되었다. 감당해야 할 인생들이 걷잡을 수 없이 많아져 열개뿐인 손가락으로 세어도 모자랐으며 발가락까지 동원한들 별 소용이 없었다. "모두가 내 인생이다"라고 생각하며 모조리 끌어안고 살았다.




옷장을 비우기로 결심하면서 설레지 않는 옷들 - 유행이 지난 스타일, 저렴한 소재,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사이즈 -을 처분했고, 직장인 라이프에는 지금도 앞으로도 미련 없음으로 결론을 낸 후, 비즈니스 용도의 옷들 또한 필요한 이들에게 나눔 하거나 비워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약 100벌의 옷들.


치열한 서바이벌을 통해 살아남은 만큼 대다수는 아마도 그 "인생"이라는 배지가 붙었던 옷들일 것이다. 그만큼 옷장 안에서는 나름 탑 티어급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소중히 관리되었던 옷들이다. 여전히 쓸모가 있고 상태도 양호해 계절성만 맞는다면 내일 당장 입고 나가도 손색이 없다.  


게다가 이제는 옷장이 폭발하던 시절과 비교해 그 수가 약 4분의 1로 줄었으니 이쯤에서 비움은 멈추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제 드레스룸에도 제법 공간이 생겼기에 적어도 바람이 들어왔다가 숨이 막혀 갇혀버리는 불상사는 없으며, 옷과 옷 사이 간격에도 다소간의 여유가 생겼다.


옷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고르고 입고 꺼내는 것에도 불필요한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는다. 짜증이나 스트레스 또한 많이 줄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더 비우고 싶다.


당초 비움의 목적은 빽빽한 옷장으로부터의 탈출이었을지 모르나, 덜 중요한 옷들을 선별하고 버릴수록 남겨진 옷들에 대한 애정이 예전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얘도 예쁘고, 쟤도 예쁘고.. 아~ 몰라! 다 내 거야~ 못 잃어!"라는 마인드였다면 지금은 "예쁘지만 입을 날이 올까?"라는 의문이 먼저 생기는 것이다.


회사와 같이 겉모습이나 인상이 서로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 집단 사회를 벗어나고 나니, 옷 자체에 대한 집착이나 소유욕이 희미해졌다. 옷이 나의 가치를 높여주고 옷을 잘 입어야 멋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부터도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옷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자신에 대한 책망, 주름진 얼굴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옷들에 대한 자각, 나이를 먹으면서 옷을 포함해 신경 쓸 대상을 줄이고 싶다는 소망들이 더해지면서 필요한 옷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치자 "결국 입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입지 않게 될 옷"이란, "인생 옷"이었지만 더 이상 인생이 아닌 것들.


4년 전에 구매한 마+면 혼방 스커트 자매는 작년에 화이트 티셔츠 5벌로 여름을 날 때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번갈아 나의 하루들을 책임졌다. 기장은 딱 발목 위로 키가 커 보이는 데다 허리와 아랫단이의 마감처리가 깔끔했다. 무엇보다 3만 원대의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면+마 천연소재로만 짜여 있어 통기성과 감촉 또한 훌륭했다. 출근용으로도 평소에도 단정한 차림을 하고 싶을 때 손이 가는 것들이었다.

면+마 스커트의 활용법 - 심심풀이 캡슐 옷장(2021년)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입을 때마다 허리가 딱 맞아서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그 때문에 이 옷들을 입는 날이면 소식을 하거나 먹는 것을 자제하여 배가 부른 상황을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연예인도 아니요, 몸매를 가꿔야 할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닌데 나를 옷에 맞췄던 것이다. 이는 일종의 부자연스러움이었고, 나에 대한 속박이었다.


얼마 전, 여전히 불편감이 있는지 최종 실험해 보기 위해 외식하는 날에 맞춰 하루씩 이 옷들을 입고 생활해 봤다. 아이보리 색을 입은 날에는 결국 한쪽 옆구리 지퍼를 내린 채(부끄러워도 용기는 있는 편) 저녁을 먹어야 했고, 머스터드색 옷을 입은 날에는 볼록해진 배가 신경 쓰여 허리춤에 카디건을 매고 돌아다녔다.


내가 생각하는 옷의 편안함이란, 내 몸과 조화를 이루며 마치 내 몸의 일부인 듯, 그 무게가 적당해 몸을 누르지 않으며, 움직임의 마찰이 최소화되어 활동이 편안한 상태를 뜻한다. 이는 밥 한 끼 먹었다고 허리와 배를 살펴야 하는 옷이라면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 일반적인 회사원의 삶을 포기했고, 다층적으로 얽힌 사람 관계를 줄였다. 궁둥이를 걷어차는 자기 계발서보다는 지금도 괜찮다고 다독이는 힐링 에세이 쪽이 훨씬 편안하다. 두려움과 울렁증을 느끼는 자동차 운전석 대신 유유히 페달을 밟는 자전거의 좁은 안장을 선호한다. 알찬 여행을 위해 분 단위로 계획을 짜는 것보다는 느지막이 일어나 한두 군데를 느긋하게 관광하고, 맛집에 줄 서기보다는 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이름 모를 식당을 편안하게 생각한다.




편안하게 살고 싶다.


모든 것을 내가 편안한 조건에 맞출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편안함을 선택하고 싶다.


옷장은 스스로 그 수량과 구색을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인 만큼 나의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편안하게 만들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옷장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옷"으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아무리 디자인이 예쁘고 색감이 고와도 입었을 때의 불편감이 먼저 떠오른다면, 입으려면 소화불량을 감수하거나 속을 비운다는 각오를 해야 하는 옷이라면 편안한 옷이 아니다. 편안함을 선사하는 옷장이란 제약이나 조건 없이, 그리고 두려움 없이 꺼내 입을 수 있는 옷들로만 채워진 공간일 것이다.


내 인생이 변했으니 인생 옷도 변했나 보다.

이제 "인생 옷"은 그저 편안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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